유시민님의 작년 경선 당시 특강 동영상 일부입니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붕괴와 히틀러 집권을 2007년 한나라당 집권과 비교하여 설명해 주셨는데.. 우려했던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참고자료 :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구조와 그 헌법적 의의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구조와 그 헌법적 의의
송석윤 (대전대학교 법학과)
I. 머리말
1. 연구의 대상과 목적
이 글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정당구조를 살피고 이와 관련된 헌법적인 문제들을 봄으로써 상대적으로 짧은 헌정사를 지닌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발전에 귀감으로 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독일의 근현대헌정사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서유럽이나 북미에서와는 달리 경제적 성장이 정치적 민주화로 연결되지 않고 오랜동안의 지체를 경험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산업혁명 이후의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군주정으로부터 의회민주주의에로의 전환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입헌군주제라는 관헌국가적 지배질서가 20세기초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성립은 이러한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의 비동시성이 처음으로 극복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독일의 헌정사적 경험이 흔히 "개발독재"라고 불리우는 권위주의체제 하에서 경제성장이 이루어 지고 이제 정치적인 민주화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헌법정치적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정당구조와 관련한 바이마르헌정사는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원주의화경향과 그에 따른 이익갈등의 문제에 직면해서 민주적 정당국가의 헌법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부과하고 있다.
2. 연구의 방법
독일 바이마르헌법은 흔히 본(Bonn)기본법의 쓰여지지 않은 한 부분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민주적이라고 일컬어 졌던 바이마르헌법에 기반하였던 민주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던 경험이 제2차대전 이후의 독일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녔던 것을 보여준다. 바이마르공화국은 오랜 입헌군주제적 헌법질서를 극복하고 독일헌정사에서 최초로 의회민주주의를 건설하였다. 이는 동시에 그 동안 성장하여 온 정당들이 직접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통치의 주체가 되었던 정당국가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이마르공화국의 실패는 정당국가의 실패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의 역사학자와 헌정사가들은 바이마르 정당국가의 실패원인을 규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것을 새로운 민주주의의 건설에 참고하려 하였다. 하지만 1950년대와 60년대의 연구결과들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이후의 보다 실증적인 연구를 통하여 역사현실에 맞지 않는 "신화"로 판명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바이마르공화국이 실패한 것은 잘못된 헌법때문이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헌법의 문제를 살핌에 있어 현실적인 배경을 도외시하는 방법론적인 접근방식에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바이마르의 역사가 바로 나찌의 집권과 연결되었고 따라서 50년대와 60년대 연구자들의 상당수가 동시대인으로서 역사연구에 필요한 적정거리를 유지하지 못하였던 데에 보다 깊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인적 과거청산과 과거와의 단절이 이루어 졌지만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일 바이마르민주주의의 실패원인을 헌법이 규율대상으로 삼았던 사회나 그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보다는 헌법 자체에서 찾아내던 분위기 속에서 주로 제기되었던 문제들이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의한 정당난립, 헌법상의 직접민주제적 요소의 도입, 제국대통령의 비상대권 등이었다. 독일 헌정사과 그에 기반한 독일 헌법이론이 우리나라의 헌법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바이마르민주주의 붕괴의 원인을 몇개의 헌법상의 제도에서 찾는 단순논리는 보다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상대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이마르헌정사에서의 정당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구체적인 정당현실을 분석하는 역사학적인 접근이 기본이 될 터인데, 특히 정당구조를 사회구조와 연결하여 이해하려면 그중에서도 사회사적인 접근이 유용할 것이다. 또한 고도로 발달한 다원주의적 정당국가에서의 민주주의의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려면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정치문화를 규명하는 정치학에서의 작업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바이마르 헌법학설을 고찰하게 될 것인데, 이는 결국 헌정사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규명하는 데에는 학제간의 연구가 불가피하다는 방법론적 필요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3. 연구의 개요
이러한 문제의식하에서 이 연구는 바이마르공화국 정당의 체제와 특성 및 그것이 지닌 문제점을 살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바이마르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나찌가 집권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후에는 바이마르정당국가에 대한 헌법학에서의 논의를 다원주의론과 동질성개념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바이마르의 정당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II.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구조
1. 11월혁명과 정당국가적 의회민주주의의 탄생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이 확실해지면서 의회에 진출해 있던 독일의 정당들은 기존의 입헌군주제(konstitutionelle Monarchie)헌법을 의회군주제(parlamentarische Monarchie)헌법으로 개정함으로써 전후의 상황에 대처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당들의 시도는 1918년 11월혁명의 물결 속에서 민중의 요구에 의해 공화국이 선포됨으로써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혁기에서 정당은 일단 정치적 사건들의 전면에서 물러나 있게 된다. 하지만 혁명의 결과가 의회민주주의의 선택으로 귀결되자 정당은 정치무대의 전면으로 대두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의회민주주의에서 정당은 더이상 단순히 정부에 대해 사회를 대표하는 입장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이제 정당은 자신의 당원을 국가의 영역으로 파견하여 국가기관을 조직하고 창조력과 책임감으로 정치를 주도해야 했다. 의회민주주의의 성패는 정당의 기능여하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의회민주주의로의 결정은 동시에 - 당시의 사람들이 충분히 인식하였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 정당국가로의 결정이었다.
바이마르정당체제의 기본구조는 그 이전의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상당한 연속성을 보이므로 먼저 19세기에 독일의 정당체제가 형성되는 모습을 살피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2. 독일입헌주의하에서의 정당체제의 형성
독일에서 정당이 상대적으로 되늦게 형성된 것은 의회제도의 정착이 상대적으로 지체된 결과였다. 정당이 정치운동 속에서 느슨하게 조직된 그룹으로서의 초기형태를 극복하고 비약하게 된 것은 1848/49년의 혁명을 겪으면서였다. 이 때에 원내교섭단체로서의 정당의 원내조직과 이른바 "정치적 결사"(politische Vereine)로서의 정당의 원외조직이 공고해 진다. 이미 1848년 삼월혁명 이전 시기에 형성되어 있었던 다섯가지 정치적 경향의 구별이 더욱 뚜렷해진 것도 이 때였다. 이제 민주적 시민계급, 자유주의적 시민계급, 정치적인 카톨릭주의, 보수주의 그리고 노동운동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었던 것이다. 정당의 조직적 발전은 혁명이후의 반동기에 일시 정지되거나 후퇴하지만, 독일제국성립 이전의 약 10년동안 새로이 결정적인 부흥기를 맞이한다. 자유주의세력은 이 시기에 특히 프로이센의 군대 및 헌법갈등(Preußische Heeres- und Verfassungskonflikt)을 계기로 정치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관료주의적인 관헌국가의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허약함을 드러내었고, 당대인 핵심문제였던 민족통일의 과제를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기본적으로 비스마르크의 성공적인 외교정책을 통해 추진되었던 독일의 민족통일과정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패배를 겪으면서 자유주의세력이 1866/67년에 좌파자유주의자와 민족자유주의자로 분열되었다. 이는 독일자유주의의 분열이 취종적으로 고착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정치발전과정에 있어서 자유주의세력의 주도력결여로 인해서 독일정치가 전반적으로 국민전체를 상정하는 정치로부터 계급정치로 이행하는 것이 촉진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정치적 카톨릭주의가 정치적 자유주의로부터 이탈하는 시기가 앞당겨졌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시민적 민주주의로부터 이탈하는 단초는 이미 1848/49년 혁명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노동운동이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인 목표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에 비해서 강력한 국가지향성을 띄었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 자각하면서 사회적 요구를 강화시키는 것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이 상반된 감정이 병존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계속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과정이 종지부를 찍은 것은 70년대 초반에 자유주의자의 다수가 이미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에 동화된 것이 명백해진 시점이었다. 통일과정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이른바 민족문제의 소독일주의적인 해결로 인해서 카톨릭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적-북독일적 특징을 지닌 독일제국에서 종교적인 소수세력이 되었다. 1870년대 초에 정치적 카톨릭주의는 새로운 대중정당인 중앙당을 세운다. 이 정당이 성립되어 결속하게 되는 데에는 비스마르크가 주도하고 자유주의자들이 지원했던 문화투쟁에서의 카톨릭에 대한 억압적인 분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치적 카톨릭주의정당과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형성되고 뿌리를 내리는 1870년대 중반에 이르면 다섯개의 흐름으로 대별되는 독일의 정당체제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정당체제의 근간은 카이저제국 기간동안에 합병, 분열, 당명변경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채 남아 있었고 바이마르공화국으로 이행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는데, 이는 좌파자유주의, 민족자유주의, 카톨릭중앙당, 자유보수주의와 독일보수주의로 분열된 보수주의자 및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으로 구성되었다.
3. 바이마르공화국 정당체제의 연속성
(1) 5개 유형의 정당체제
입헌군주제에서 의회민주주의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독일정당들의 기본구조는 주목할 만큼의 연속성을 보였다. 정치적 변혁으로 인해서 일련의 새로운 창당작업이 있었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그 이전의 정치흐름들이 본질적인 변화없이 그대로 존속하였다. 카이저제국에서는 독일보수당(die deutschkonservative Partei)과 독일제국당(die deutsche Reichspartei)으로 양분되었던 보수주의세력은 1918년 11월 24일에 독일민족국민당(die Deutschnationale Volkspartei)을 창당하였다. 군주제로의 복귀를 정강정책으로 하던 독일민족국민당에는 기독교사회적(christlichsozial) 세력, 독일국수주의적(deutschvolkisch) 세력, 반유대주의적(antisemitistisch) 세력 등 다양한 집단들이 참여했다. 한편 단일한 자유주의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협상이 실패한 후인 1918년 12월 5일에는 자유주의우파 중에서 슈트레제만(Stresemann)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독일국민당(die Deutsche Volkspartei)을 세웠다. 독일국민당의 정강정책은 공화국이라는 국가형태에 대해서 유보적이었다. 자유주의좌파세력은 기존의 자유주의우파세력의 일부와 함께 1918년 11월 20일에 독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정치적 카톨릭주의세력에게는 새로운 창당이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존의 카톨릭중앙당이, 잠시 기독교국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존속하였다. 하지만 카톨릭중앙당은 같은 카톨릭세력에 기반을 두면서도 연방주의적 성향을 강조하는 바이에른국민당(die Bayerische Volkspartei)이 1918년에 창당되고 1920년에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독일사회민주당(die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으로 집중되어 있던 노동운동세력에게도 정치적 카톨릭주의와 마찬가지로 강한 영속성이 나타났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사민당은 노동운동세력의 유일한 정치적 대표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분리되었던 독립사민당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1920년에 독립사민당의 좌파가 그 사이에 창건된 독일공산당에 참여하고 독립사민당의 우파가 사민당으로 재합류한 이후부터 바이마르공화국이 붕괴되기까지 사민당과 공산당이라는 두개의 노동자정당이 양립하는 구조가 지속되었다.
(2) 군소정당
이러한 다섯가지의 주된 흐름을 제외하고도 다수의 군소정당(여기서는 선거득표율이 4%미만인 정당을 의미함)이 있었던 형편은 카이저제국 때와 다르지 않았다. 1912년의 라이히하원 선거결과 전체 397석 중에서 28석을 점하고 있던 소수민족정당들은 베르사이유조약에 따라서 영토가 줄어든 관계로 한두석 정도의 의석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나찌주의자들 역시 1930년이후의 도약이전까지는 군소정당에 속하였다. 일시적으로 적지 않은 세력을 보여 주었던 정당으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한 경제당(die Wirtschaftspartei)을 들 수 있다. 경제당은 1928년과 1930년의 선거에서 각각 4.5%와 3.9%의 득표율로 23석을 획득했었다. 군소정당의 득표율은 전체적으로 보아 우선은 카이저제국에서(1912년 13.6%) 보다 감소하였다가(1919년 1.3%) 1920년부터 다시 증가하여(5.1%) 1930년에는 20.8%로 최고치에 이르렀다. 1932년의 선거에서 기존의 군소정당들에게 행해지던 투표의 상당부분이 나찌당으로 흡수되면서 이 비율은 다시 8%로 내려갔다. 이러한 군소정당의 전개양상으로부터 유권자의 정당선호의 변화를 분석하는 중요한 지표들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 하에서 군소정당의 역할은 몇 개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기본적으로 그리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입헌군주제하에서 형성되었던 정당체계가 물론 위기상황의 징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28년경까지는 본질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었다.
(3) 당내 권력구조의 불변
혁명이 발발한 후 몇달동안은 각 정당들 내부에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중도 내지 우파정당에서 뚜렸했다. 지금까지 기존정당 내에서 좌파적인 경향을 지니던 정치인과 당내파벌들이 정당지도부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톨릭중앙당에서는 에르츠베르거(Erzberger)가 정당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고 또한 카톨릭노동운동출신의 정치인들의 당내입지가 강화되었다. 독일민주당의 지도부에서는 창당을 주도하였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밀접한 협력관계를 지향하던 그룹이 자유주의좌파정당의 전신이던 진보국민당(die Fortschrittliche Volkspartei)의 지도부에서 보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보수주의정당인 독일민족국민당에서조차도 독일보수주의의 반동적인 노선을 지향하던 정치인들은 우선은 뒤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 정당 내에서의 권력중심의 이동이 지속적이지는 못하였다. 당내 우파에 속하던 구세력들은 1920년경에 이르면 잃었던 당내지위를 상당부분 회복하게 된다.
우파세력이 혁명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을 유지했던 정치상황의 전개에 대해서 사회주의세력은 실망하게 되었다. 이것이 날로 급진화하던 독립사민당과 공산당이 사민당의 지지기반을 잠식하며 노동자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좌파로부터의 압력은 다시 사민당우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이마르정당구조가 양극화하는 전제조건은 이미 초기부터 주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 정당의 사회적 기반
(1) 이익정당화 대중정당화현상과 그 문제점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정당들에 있어 근본적으로 새로운 조건은 정치적인 경쟁이 훨씬 민주적으로 되었다는 점이었다. 지방선거에서는 여전히 남아있던 상류계층의 선거법상의 특권은 사라졌으며, 이전의 친정부적인 세력들은 더이상 선거에서 국가행정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대중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중도 내지 우파정당들은 독자적인 대중조직을 구축하는 노력을 배가하여 "통합정당"(Integrationspartei)으로 변신하려 하였다. 정당들이 당명을 정함에 있어 스스로를 즐겨 무슨 "국민당"(Volkspartei)이라고 부르는 유행으로부터 이러한 분위기의 징표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양상은 이미 카이저제국에서 시작되었던 정당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대중조직이 상호연대하는 현상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였다. 독일의 정당체제는 그 형성시부터 주로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정당구조는 1870년대말의 경제정책과 국내정치의 전환과 함께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1873년에 시작된 경제위기는 농업의 구조적인 위기에 의해서 더욱 심화된다. 이러한 경제위기에 직면해서 특히 보호관세정책을 중심으로 한 갈등과 관련하여 경제정책에 대한 이해대립이 첨예화되고 이는 정치적 대결로 전화되었다. 이는 정당활동의 중점이 헌법정치적인 문제로부터 멀어져서 경제사회적인 이익대표로 축소됨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의회의 정치적 잠재력을 약화시키고 민족자유주의자를 분열시키려 하였던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의해 의식적으로 조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당의 변화는 또한 강력한 이익단체의 등장에 의해서 촉진되었다. 이들 이익단체는 보호관세와 관련된 투쟁의 과정에서 성립하여 곧이어 정치영역에서 정당과 경쟁하게 된다.
이처럼 정당들이 정당정책적으로 사회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지향하게 되는 것 이외에도 1890년대 초반에 이르면 정당의 조직분야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 지금까지 비사회주의 부르조아정당들은 선거운동에서만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명사집단에 의지했었고 어떠한 원외의 대중조직도 지니지 않았었다. 하지만 1889/90년 파업의 물결 이후 사회민주당이 노동조합과의 연계 속에 대중조직을 확보하게 되자 이들 정당들도 항시적으로 활동할 대중정당으로의 조직적인 변신을 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보다 깊은 이유는 경제적 위기를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국민의 범위가 넓어진 데 있었다. 농업분야에서의 위기는 특히 심각해서 새롭게 결성된 농민단체의 주도하에 특히 강력한 대중운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신흥 이익단체들은 자신들의 대중조직을 정당기구가 없던 기존의 명사정당에 제공하면서 정당에 대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정당의 이러한 이익정당으로의 정강정책상의 변화와 대중정당으로의 조직상의 변화는 산업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유권자의 이해관계다변화와 정치화의 부득이한 결과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정당이 정부를 구성하여 통치의 책임을 지는 길이 막힌 상황에서 기존의 정당체제가 유지되는 속에서 진행되었고, 이는 정당들이 상대적으로 폐쇄된 각자의 사회적 지지기반에 고착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었다. 정당정치의 기초가 세계관에서 이해관계 바뀌고 그와 함께 개별정당의 정치적 의미도 변화했지만 독일의 정당체제 전반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다. 이처럼 정당의 발전이 정체된 상황은 장기적으로 보아 정치의 진전된 의회주의화라는 헌법정치적인 관점에서 정당들을 포괄하는 연대의 형성이나 보다 넓은 사회적 지지기반을 지닌 국민정당으로의 발전을 저해했다.
(2) 사회적 지지기반의 고착화와 그 붕괴의 징후
앞에서 살핀 대중정당화의 경향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개상황 속에서 이미 카이저제국 시대에 결속력이 강한 사회배경에 기초하는 대중적 기반을 지녔던 정당들은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카톨릭중앙당은 계속해서 카톨릭세력에 기반을 둘 수 있어서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사민당 역시,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분열로 지지기반의 일부를 공산당에게 내주었지만, 여전히 노동자세력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보수주의정당인 독일민족국민당은 전쟁이전의 보수주의정당과는 달리 더이상 엘베강동쪽의 대토지소유자와 농민단체인 농민연맹(Bund der Landwirte)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독일민족국민당은 개신교회와 농민단체와의 기존의 연대를 넘어서 "전독일연맹"(Alldeutscher Verband)이나 "철모, 전선병사동맹"(Stahlhelm, Bund der Frontsoldaten) 등과 같은 국수 민족주의적인(volkisch-nationalistisch) 집단들과의 밀접한 연계를 추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양태로 존재하던 극우민족주의세력들은 전쟁과 전후의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에서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독일민족국민당은 적어도 나찌당이 약진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극우민족주의적인 세력을 확고한 기반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언급한 정당들과는 달리 자유주의정당들은 원외의 대중조직들과의 밀접한 연계를 확보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자유주의정당에 투표하는 유권자들이 워낙 다양하고 이질적이었던 때문에 하나의 결속력있는 집단이 나올 수가 없었다. 자유주의정당들은 바이마르공화국 초기까지는 어느정도 과거의 지지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1924년부터는 유권자를 모으는 통합력을 급격하게 상실하게 된다.
바이마르정당들이 지녔던 이러한 기존의 - 또는 부분적으로 공화국초기에 새로이 보완한 - 사회적 기반에는 이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 카톨릭중앙당의 경우에는 헌법제정국민회의의 선거에서는 새로운 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지지기반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기존의 지지율을 상회하는 선거결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1920년부터는 이미 카이저제국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완만하지만 지속적인 하강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정당들의 득표율도 1920년에는 1912년선거의 수준으로 떨어져서 그 이후에는 구조적인 득표율상승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보수주의정당에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경제위기하에서 치러진 1924년의 선거에서 자유주의정당의 지지기반이던 도시유권자들의 항의성 투표를 획득하였던 것을 예외로 한다면 보수주의정당도 전쟁이전의 득표율을 대체로 유지하는 데에 그쳤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자면 이미 전쟁 전부터 존재했던 각 정당들과 특정 사회집단들과의 밀접한 연관성이 바이마르공화국이 생성되던 이행기에서의 일시적인 변화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이마르정당들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의 외연을 확장하려 노력하는 것보다는 사회 경제적인 제이해관계들과의 기존의 관계를 공고히하는 데에 주력했던 것이었다.
III. 정당들의 세계관정당적 성격과 연정형성의 문제점
1. 독일정당의 세계관정당적 성격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정당구조가 대중조직을 지닌 이익정당으로 변하는 상황이 지속되었지만 이로써 독일정당이 그 탄생부터 지니고 있었던 세계관정당으로서의 특성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수이익들은 입헌군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념들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당들은 사회의 이해대립을 주도적으로 중재하여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지니지 못하였다. 정당은 오히려 이해관계가 정치화하는 과정에서의 형식적인 중간정거장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이해대립의 세계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이를 강화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일반국민들이 정치에 대해서 만병통치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당이 독자적인 주도권으로 이러한 기대를 합리적으로 유도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한에는 국민들은 정책결정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의회민주주의하에서의 정책결정은 다양한 이해와 입장들간의 타협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정당들이 지니고 있었던 세계관정당적인 특성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부분적으로는 강화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따라서 타협을 해야하는 정당의 활동공간을 제약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극우 및 극좌의 입장에서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던 정당들에게는 항의투표를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들에서 발견되는 세계관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성격은 사실 오랜 뿌리를 지닌 것이었다. 19세기에 독일에서 정당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이미 관료와 군대라는 고도로 발달된 국가의 "기간조직"이 오래전부터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은 후였다. 이에 반하여 정당들은 초기에는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지니지 못하였고 거의 전적으로 소수의 교양시민계층에 의지해야만 했다. 정당의 방향을 결정했던 정치철학의 흐름들도 국가기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독일정당들은 그 생성기에 있어 정치에 대해 책임있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당들은 세계관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라이히헌법에 의하면 정당의 주된 활동영역인 의회는 입법과정에 참여하는 권한은 갖지만 정부구성으로부터는 배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당은 정치권력획득을 위한 투쟁에서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사회 경제적 대립의 조정작업이나 정부정책에 대한 찬반의 입장표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당은 카이저제국 기간 동안에 정치과정에서 점차 더 많은 역할을 하게 된다. 동시에 독일정당은 기존정치질서에 대해 묵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적응하고 또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연계를 맺는 과정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기도 한다. 하지만 헌법구조적으로 정당이 통치의 책임을 지는 것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던 한에는 독일정당이 지녔던 원리주의적인 성격은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단지 새로운 요소와 중첩될 뿐이었다. 정당의 분열, 정당 간의 안정된 협력관계의 공고화의 어려움, 첨예한 당내노선투쟁 등 카이저제국의 정당들이 지녔던 문제의 원인은 직 간접적으로 독일정당에 내재하고 있던 세계관적 원리주의적 특성에 있을 것이다. 정부의 구성을 의회가 주도하는 의회민주주의로의 전개가 정체된 상황에서에서 정당이 젊은 정치지망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활동공간이 넓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정체상황이 명백해진 카이저제국 후반기에 정당들은 인력충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 문제점은 후에 바이마르공화국시대에 정당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입헌군주제하에서는 정당들이 반드시 의회에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다수를 형성할 필요가 없었다. 정당들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대해서 야당의 역할을 하였고 이에 익숙해 있었다. 입헌군주제하에서 형성된 이러한 역할인식이 공화국으로의 이전에도 불구하고 남아있었다. 정부를 구성하는 데에 참여한 정당들은 야당들의 공격에 대해서 정부의 지원세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정부를 비판하는 의회야당역할을 하였다.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정당들의 내각에 대한 입장이 당내의 권력구조가 수시로 변하는 것에 따라서 바뀐다면 예측가능한 일관된 정책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바이마르공화국의 기간 동안에 출신정당의 결속된 지원을 받으며 정부에 참여할 수 있었던 정치인은 전혀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 정도였는데, 자유주의우파정당인 독일국민당 내에서의 그의 지도적 입장도 항상 안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정당들의 이러한 역할인식은 정당들에게 여전히 남아있던 세계관정당적인 특성과 함께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연립정부들이 허약하고 불안정했던 원인을 제공하였다.
2. 연정구성의 어려움
정부를 구성하는 다수정당과 체제내적인 야당들간의 정권교체라는 의회주의 특유의 기능방식은 바이마르공화국 동안에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미 헌법제정국민회의에서부터 바이마르연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정당들(독일민족국민당, 독립사민당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독일국민당)은 정부의 정책 뿐만 아니라 정치체제의 기초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920년 7월선거에서 바이마르연정이 과반수의석을 상실함으로써 더욱 심각해졌다. 이 선거에서 기존에 연정을 구성하였던 사민당, 독일민주당, 카톨릭중앙당의 의석비율이 78%에서 44.6%로 급전직하했던 반면에 야당들은 많은 의석을 추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거결과는 직접적인 계기는 쑼과 뤼트비츠의 쿠데타시도(Kapp-Luttwitz-Putsch)에 따른 정정불안으로 여당들이 신뢰를 상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깊은 이유는 이미 1919년부터 새로운 헌법질서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좌우의 반체제세력들이 정비되고 강화되었던 데에 있었다. 바이마르연정의 정당들이 더이상 의회의 다수를 점하지 못하게 되면서 1920년이후에는 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세가지로 제한되었다. 첫째의 가능성은 "부르조아동맹"(Burgerblock)이라고 불리우던 중앙당과 독일민주당으로부터 독일민족국민당까지의 연정이었고, 두번째의 가능성은 사민당으로부터 독일국민당까지의 정당을 포괄하는 대연정이었고, 마지막의 가능성은 중도우파정당들의 소수내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가지의 가능한 방식 중 어떤 것으로부터도 안정된 연정이 구성될 수 없었다. 앞의 두가지의 경우에는 외교정책과 경제사회정책의 기본노선에 대한 반목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도정당들의 소수연정은 사민당이나 독일민족국민당의 지원 또는 최소한도의 인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부는 주어진 현안에 따라서 항시 변하는 다수의 지원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연정구성의 문제점은 기본적으로 연정을 구성하는 주체인 정당의 수시로 변하는 정책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연정구성과 관련하여 특히 어려움을 겪은 것은 좌우 양익의 정당인 사민당과 독일민족국민당이었다. 사민당은 - 1924년의 수개월 동안을 제외하고는 - 1932년까지 라이히하원에서 최대의 원내교섭단체였으며 동시에 바이마르공화국이 붕괴되는 시점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헌법이 부여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민당의 역할은 자신이 점하는 정치적 중요성에 미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의회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 사민당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충족될 수 없었다. 바이마르공화국으로의 이행과정에서 다수사민당은 자유민주주의적인 경기규칙에 기초하여 노동자와 시민계급이 공존하고 협력하는 체제로의 정치적 결단을 내린 바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사민당이 자신의 의석수에 상응하여 정부구성에서 적극적으로 지도적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사민당의 유보적 자세가 증대되었다. 1920년의 선거패배 후에 사민당은 연정에서 이탈하였다. 독립사민당의 좌파가 공산당과 연합하고 잔류세력이 사민당으로 재통합됨으로써 사민당내의 좌파가 강화된 후에는 사민당은 부르조아정당들과의 연정구성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기본적으로 시민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최종목표를 추구하는 강령과 브루조아정당들과의 협력이 불가피하였던 정치의 현실과의 괴리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1년의 괴어리츠강령(Gorlitzer Programm)은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화하려는 개량주의노선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1925년의 하이델베르크강령(Heidelberger Programm)에 의해서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이렇게 해서 사민당은 원칙의 문제와 권력의 문제 사이에서 명료한 균형점을 찾는 데 실패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이 - 특히 외교정책상의 문제일 경우에는 극우민족주의적인 우파세력의 반대로 - 사민당의 협력없이는 결정될 수 없었으므로 사민당은 온건부르조아연정을 직접 참여하지 않은 채로 지원하였다. 이로써 사민당은 야당의석에 앉아 있는 절반의 여당이라는 매우 복잡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사민당은 라이히에서와는 달리 오토 브라운(Otto Braun)의 지도하에 카톨릭중앙당 및 독일민주당, 그리고 때로는 독일국민당과 함께 안정된 연정을 지속하여 바이마르공화국의 안정에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우익정당인 독일민족국민당은 연정구성에 있서 더욱 복잡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독일민족국민당은 한편으로는 의회민주주의라는 체제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지지세력의 이해관계를 대표하기 위해 현존하는 정치공간에서 가능한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당은 일관된 반체제와 바이마르체제와의 제한된 협력이라는 두가지 선택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1924년이후 정세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독일민족국민당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이익단체들로부터의 중도부르조아정당과의 연정에 참여하라는 요구가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일민족국민당은 1925년과 1927년에 부르조아동맹내각에 참여하였다. 독일민족국민당의 공화국체제에 대한 이러한 접근과정은 1928년에 철저한 반바이마르노선을 추종하던 후겐베르크(Hugenberg)가 당내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온건세력이 당을 떠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독일민족국민당이 나찌당과의 협력노선을 추구하면서 부르조아동맹에 의한 정부구성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카톨릭중앙당의 경우는 카톨릭을 종교로 지닌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좌우파의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중앙당은 이러한 유연성 때문에 1919년의 헌법제정국민회의부터 1932년에 중앙당출신의 수상이었던 브뤼닝(Bruning)이 실각할 때까지 모든 라이히정부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연정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하였다. 중앙당 내부의 당권은 바이마르공화국이 경과하면서 점차 우경화하여 1928년에는 보수적인 신부인 카스(Kaas)가 당수로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양상이 라이히대통령주도로 구성된 브뤼닝내각 치하에서 더욱 가속화되면서 사민당과 협력하려는 노선은 극도로 약화된다.
두개의 자유주의정당들은 사민당과의 연정을 회피하던 독일국민당의 우파를 제외하고는 세가지의 연정구성방식에 모두 개방된 입장을 취하였다. 문제는 오히려 자유주의정당의 전통적인 지지세력이 점차 붕괴하는 것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초기만해도 20%를 상회하던 두 자유주의정당의 득표율합계는 1928년까지 약 3분의 2로 줄었다가 1932년에는 전체투표의 2%수준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자유주의정당에 대한 투표행태의 변화는 1920년에는 독일민주당에서 독일국민당으로 이전하는, 즉 자유주의정당간에 이전하는 양태로 나타났지만, 1924년에는 자유주의정당의 지지표가 독일민족국민당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유권자들의 대다수는 1928년선거에서 독일민족국민당을 떠나지만 이들은 다시 자유주의정당으로 돌아오지 않고 의회민주주의에 비판적이던 중산층정당이나 농민정당 등 군소이익정당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중도자유주의정당들의 약화로 인해서 당해 정당 뿐만이 아니라 전체 정당체제가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상황 속에서 좌우양익의 정당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설사 한 정당이 과반수의석을 차지하였다고 하여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좌우양익정당인 사민당과 독일민족국민당의 상호불신으로 인해서 이러한 정부구성은 정국의 불안을 야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중도정당들은 연립정부의 정책이 노동자세력과 브루조아세력이 정치적으로 생존하는 기초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보장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좌우양익정당들의 입장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상호 최소한도로 인내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정당의 약화는 동시에 정치제제 전반의 양극화에 대한 안전보장수단의 동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3. 정당체제의 양극화와 의회민주주의의 위기
정치체제의 양극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1928년의 선거결과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선거에서 사민당이 약진한 반면에 브루죠아동맹연정에 참여했던 정당들은 모두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이 선거결과에 따르자면 사민당의 주도하에 대연정을 하는 것이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이른바 브루조아동맹은 더이상 과반수의석을 지니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독일민족국민당은 이 선거 이후에 명백한 반바이마르노선을 선택하였다. 또한 중도정당들이 소수내각을 구성하는 것은 전체유권자의의 4분의 1만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들의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정치적으로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사민당과 독일국민당 간에 난항을 거듭하던 협상 끝에 사민당의 헤르만 뮐러(Hermann Muller)를 수반으로 하는 대연정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 대연정의 존속기간동안 내내 연정 내의 좌우익정당간에 노선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한편으로는 슈트레제만이 1929년에 사망한 후에 독일국민당이 우경화하면서 더욱 심각해 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민당 역시 사회파시즘이론에 기초한 공산당의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지지기반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유연성을 발휘하는 데에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였다.
대연정은 1930년 3월에 실업보험제도를 개선하는 문제에 대한 사민당과 독일국민당과의 협상이 결렬되는 것을 계기로 종료되었다. 대연정붕괴의 원인으로 사민당의 전술적인 미숙함과 의회주의현실에 대한 사민주의의 장기적인 복안의 부재도 간과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 최후의 의회주도정부가 실패한 보다 깊은 원인은 부르조아세력이 우경화하면서 사민주의와의 협조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해진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적인 경기규칙을 지키는 한에서 사민당의 참여를 배제한 정부구성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회민주주의체제를 포기하는 정치적 대안이 점차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대안은 이미 대연정이 붕괴되기 이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중심은 라이히대통령인 힌덴부르크와 그의 주변세력 및 군부지도자인 슐라이혀장군 등이었다. 의회민주주의의 대안을 찾으려는 작업은 어차피 의회민주주의에 기반을 두지 않았던 정치적 우파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이해세력을 넘어서 점차 정치적 중도파 및 공업을 기반으로 한 이해세력에서도 적지 않은 호응을 얻어 가게 되었다.
IV.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위기와 정당국가의 붕괴
1. 브뤼닝내각과 바이마르정당의 약화
대연립정부가 퇴진한 사흘 뒤인 1930년 3월 30일에 브뤼닝의 대통령내각(Prasidialkabinett)이 등장하였다. 이로써 용의주도하게 의회와 정당을 정치체계로부터 배제하려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동시에 수많은 헌법침훼(Verfassungsdurchbrechung)를 동반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브뤼닝내각은 부르조아정당들 출신의 정치인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의회다수의석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의회해산을 위협하든지 또는 라이히대통령의 긴급명령을 통해서 자신의 정책을 관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6월에 의회가 해산되었다. 의회해산 이후 9월에 실시된 선거는 경기가 급속도로 후퇴하는 속에서 이루어졌고 급진정당들이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선거에서 나찌당의 의석수는 12석에서 107석으로, 공산당은 57석에서 77석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선거결과에 의해서 브뤼닝내각을 지지하는 적극적 다수세력은 라이히하원에서 형성될 수 없게 되었다. 반브뤼닝내각의 소극적 다수가 구성되지 않은 것은 사민당이 브뤼닝내각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이를 인내하는 정책을 선택한 덕택이었다. 브뤼닝내각의 재임기간 동안에 의회와 정당의 권력과 영향력은 빠른 속도로 감소했던 것에 반하여 국가권력의 중심은 이에 비례하여 행정부로, 특히 라이히대통령과 그의 보좌역들에게로 이전되었다. 브뤼닝내각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우파쪽으로의 세력확산을 시도하였지만 극우민족주의적인 반체제노선을 걷던 독일민족국민당, 철모회(Stahlhelm), 나찌 등으로부터는 여전히 타도대상이었다. 게다가 1931년 여름부터 경제위기가 가속되면서 브뤼닝내각은 민심으로부터도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1932년에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으로 재선되자 국방부 고위직에 있던 슐라이혀는 브뤼닝내각을 보다 더 우경화된 대통령정부로 교체하려고 시도하였다. 슐라이혀는 동시에 자신이 주도할 새로운 내각에 대한 나찌당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히틀러와 협상하였다. 여기서 슐라이혀는 나찌운동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새로이 건설할 권위주의체제에 포용할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후에 전개된 브뤼닝의 실각, 파펜(Papen)을 수상으로 하는 이른바 "민족통합"(nationale Konzentration)내각의 성립(이 내각에서 슐라이혀는 국방부장관에 취임하였다), 라이히하원의 해산, 나찌돌격대(SA)금지의 철회 등은 슐라이혀와 히틀러의 합의를 이행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펜과 슐라이혀가 주도하는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32년 7월 20일에 사민당이 주도하던 프로이센주정부에 대해서 이른바 "라이히집행"(Reichsexekution)을 행하였다. 1932년 4월의 선거 이후에 새로운 주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임시정부로 있던 프로이센주정부는 라이히군대의 점령에 의해서 강제로 퇴진되었다. 이로써 사민당은 최후의 권력거점을 상실하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는 상황에 봉착하였다.
2. 파펜내각과 나찌의 약진
1932년 7월 31일의 라이히하원선거에서 좌우의 급진정당들은 다시 한번 약진에 성공하였다. 나찌당은 230석을 획득하여 최대의 원내교섭단체로 되었다. 공산당은 이 선거에서 89석을 차지하였는데 양당의 의석을 합치면 라이히하원 전체의석인 608석의 과반수가 되었다. 하지만 양당이 협력을 할 가능성은 전무하였으므로 이는 소극적 과반수를 의미했다. 이 선거 후에 나찌당은 파펜내각을 인내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주도하에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톨릭중앙당의 선택이 주목되었는데, 이는 중앙당 출신인 브뤼닝의 실각으로 라이히대통령에게 실망한 상태에서 선거결과에 의해서 나찌당과 함께 원내다수를 형성할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중앙당은 파펜내각에 반대하는 나찌당의 노선에 접근하여 8월 30일에 괴링(Goring)이 라이히하원의장에 선출되는 것에 협조한다. 파펜내각이 새로이 구성된 라이히하원에서 극소수인 독일민족국민당과 독일국민당으로부터의 지원만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명백해지자 라이히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의회를 재차 해산해야 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이 의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파펜내각과 의회로부터 최소한 인내되던 브뤼닝내각의 차이점이다. 즉 바이마르헌법의 구조 속에서 대통령주도의 정부는 단지 의회가 이를 인용하는 한에서만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서 의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대통령내각은 존속할 가능성이 없었다. 의회가 해산된 후에 파펜은 선거를 무기한으로 연기하여 의회가 없는 상태에서 통치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 구상은 중앙당과 나찌당이 라이히대통령을 헌법위반으로 국사재판소(Staatsgerichtshof)에 탄핵할 위험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1932년 11월의 의회선거에서 나찌당은 라이히하원에서 최대의석을 지닌 교섭단체로 남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이백만표가량의 득표수가 감소되었다. 득표수의 감소는 곧이은 튀링겐의 지방선거에서도 계속되었다. 당시 나찌운동이 이미 그 정점을 지나 내리막을 걷고 있다는 징표는 그밖에도 발견된다. 히틀러의 입장은 자신이 수상이 되는 조건 하에서만 정부구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당내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입장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내"좌파"의 지도자였던 슈트라써(Strasser)는 히틀러의 수상취임과는 무관하게 정부구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나찌당과 나찌돌격대 내부의 갈등도 격화되었는데 이는 나찌운동의 추종자들이 매우 다양한 사회적 배경의 복합체였던 결과였다. 하지만 파펜의 입장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국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여전히 그에 대한 신임을 표명하였지만 라이히하원의 의석구성에서는 의회해산 이전과 비교할 때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파펜은 선거일을 공고하지 않고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의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방안을 다시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바이마르헌법 제25조 제2항이 의회해산 후의 선거는 60일이내에 이루어져야 함을 명시하고 있었으므로 이 시한 이후로 선거를 연기하는 것은 명백하게 헌법에 위반되는 일이었다. 수많은 헌법침훼로 통치하던 힌덴부르크에게도 이 경우는 너무도 명백한 헌법위반으로 보였다.
3. 히틀러의 집권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슐라이혀는 새로운 방책을 고안하였다. 이는 노동조합세력에서부터 나찌당의 슈트라써그룹까지를 관통하는 이른바 "횡단전선"(Querfront)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1932년 12월 30일에 슐라이혀가 파펜을 이어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이 방안이 실현되는 듯 했지만 곧이어 어려움에 부딪친다. 한편으로는 부수상으로 정부구성에 참여할 뜻을 보이던 슈트라써의 입장이 나찌당내에서 동의를 얻는 데에 실패하였다. 또한 공업과 농업의 이해관계에 기반하던 세력들은 노동수요창출을 위한 조치등 노동조합에 유화적인 정책을 포함하고 있던 신정부의 정책강령이 권위주의국가로의 지금까지의 진행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권위주의국가모델을 계속 추구하던 세력들은 이제 나찌운동이 지닌 대중적 기반의 도움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히틀러와의 담판을 통해서 슐라이혀의 노선에 대한 대안을 찾게 된다. 나찌에 대한 접촉을 주도한 것은 수상에서 물러난 파펜이었다. 1933년 1월 파펜은 나찌당의 연정참여의 조건에 대해서 히틀러와 협상하였다. 여기서 히틀러는 연정에서의 나찌당의 주도권행사요구를 점차 관철하여 갔다. 파펜은 동시에 히틀러, 독일민족국민당, 그리고 제국대통령 간의 중재에 적극 노력하였다. 이러한 파펜의 노력은 그가 1월 중순에 제국대통령으로부터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사전작업을 하라는 위임을 받아냄으로써 중요한 시점에 이른다. 이로써 힌덴부르크가 슐라이혀와 결별하는 것은 확실해졌지만 아직 새로운 정부가 어떻게 구성될 지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적인 전통에 충실한 야전사령관 출신의 힌덴부르크의 입장에서는 타협할 자세가 없이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사병 출신인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힌덴부르크는 오랫동안 망설이고 심사숙고하지만 라이히방위군이 군부쿠데타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마침내 1월 30일에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하였다. 히틀러내각에는 파펜이 부수상으로, 독일민족국민당의 지도자인 후겐베르크가 경제장관으로 참여했다. 히틀러내각은 의회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1930년이래의 내각들처럼 여전히 대통령내각이었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것은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이제 국가권력이 민주주의와 법치국가를 파괴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세력의 손에 장악되었다는 사실이었다.
V. 바이마르정당들의 나찌운동에 대한 취약점
바이마르민주주의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이 존속하던 최후의 순간까지의 과정은 여러가지 가능성 중의 선택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물론 1932년 여름에 급진정당들이 의회에서 소극적 다수을 형성해서 헌법의 기능이 마비된 이후부터는 운신의 폭이 결정적으로 협소해 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탈출구가 전혀없는 상황은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오히려 전체주의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적 의지였다. 이러한 점에서 특히 문제되는 자들은 1930년까지 의회민주주의를 권위주의적 모델로 대체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이후에 생긴 권력공간을 차지했던 세력들이었다. 바이마르민주주의 이전에 형성된 이들 구엘리트집단은 나찌의 전체주의적 독재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바이마르민주주의를 권위주의체제로 이전하는 데에 나찌운동의 대중기반이 유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온건한 정치세력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결속력있는 저항으로만 히틀러의 집권을 막을 수 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찌단과의 협력을 선택하였다.
바이마르민주주의의 실패는 기본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이마르민주주의를 방어하는 데에 실패했던 세력의 오류는 이를 파괴하는 데에 기여한 세력들의 책임과는 구별되어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유보 하에서 바이마르민주주의를 책임졌던 중도파와 좌파세력이 주어진 역사적 책무를 다하였던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바이마르체제를 지탱하던 정당들은 의회민주주의의 기능방식에 익숙하지 않았고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하였다. 1930년에 의회중심의 마지막 연정이 퇴진할 때까지 이들 정당의 역할인식은 입헌군주제하에서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다. 정당의 구조 역시 세기전환기까지 형성된 모습을 그 근본에 있어 그대로 유지하여 바이마르공화국하에서 진행되는 사회변동에 미치지 못하였다.
1. 기성정당의 소극성
특히 주목할 것은 정당들과 그들이 기반으로 삼았던 사회적 정신적 지지배경 사이의 전통적인 결속이 완화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노동자들이 사민당에 투표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바이마르공화국에 들어 약화되었다. 1928년의 선거결과를 보면 1925년 현재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가 노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유권자의 30%정도만이 사민당 또는 공산당에 투표하였다. 이에 반하여 사민당은 산업노동자 이외의 계층들로부터 보다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30년의 선거결과를 분석하면 산업노동자에 속하지 않는 사민당의 지지표가 사민당이 얻은 전체표의 40%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지유권자의 구조변화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은 당원구조로 볼 때에 여전히 노동자정당이었다. 1930년 현재 사민당원 중 노동자의 비율은 남편이 노동자인 주부를 포함하여 70%였다. 노동자 이외에는 사무직노동자(Angestellte)만이 10%의 비율로 통계상 의미있는 직능집단이었다. 중앙당과 카톨릭교도들간의 전통적인 유대관계는 이미 카이저제국에서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1870년대에는 카톨릭주민의 약80%가량이 중앙당에 투표했지만 1912년에는 이 수치가 60%를 못 미쳤다. 카톨릭교도에 대한 중앙당의 결집력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계속 약화되어 1932년 11월의 선거에서는 카톨릭유권자의 46.5%만이 중앙당과 바이에른국민당에 투표하였다. 전반적인 세속화추세 속에서 카톨릭주민 내부의 이해가 다변화되면서 카톨릭적인 기층문화가 통합력을 상실하는 것을 피할 수 없던 결과였다. 중앙당은 개신교도들에게도 지지기반을 확산하려 노력했지만 여의치 못하였다. 중앙당은 이처럼 결국 독자적인 구성원을 지닌 정당(Mitgliederpartei)이 되지 못하고 독일 카톨릭조직의 정치위원회의 역할을 하는 데 머물렀다. 중앙당이 카톨릭교회의 지원없이는 기능할 수 없었음은 1933년 중앙당의 붕괴과정이 잘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사민당과 중앙당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기 보다는 점차 느슨해 지는 전통적인 지지기반과의 유대를 유지하려는 데에 비중을 두었다. 따라서 이들 정당들은 1928년 이후에 특히 자유주의정당등 중도정당들에 투표하던 유권자들이 방향감각을 상실하면서 나타난 정당구조의 전반적인 재편과정 속에서 단지 소극적으로만 대응하였을 뿐 건설적인 해결책은 제시할 수 없었다.
비카톨릭의 중도정당들은 앞의 두 정당들과는 달리 이전의 지지기반을 전혀 유지할 수 없었다. 이들 정당의 붕괴는 바이마르민주주의의 실패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즉 비카톨릭중도정당들의 붕괴로 인해서 정치권력에 공백이 생김으로써 후에 히틀러의 집권에 협조하게 되는 구엘리트세력의 권력복귀가 용이해졌던 것이다. 또한 중도정당의 지지유권자들이 나찌당의 지지자로 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은 나찌당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의회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에 기여한 측면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부르조아중도세력의 붕괴는 이들 정당들의 분열로 시작되었다. 중소상공법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당(Wirtschaftspartei)과 국민권리와 화폐가치상승을 위한 라이히당(Reichspartei fur Volksrecht und Aufwertung)이 각각 1920년과 1926년에 창당된 바 있으며, 1928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계층을 기반으로 독일농민당과 기독교민족농민당이 창당되었다. 또한 독일민족국민당의 급진우경화로 이탈한 세력이 기독교사회국민봉사당과 보수국민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속되는 정당분열상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민주당이 1930년에 독일국가당(Deutsche Staatspartei)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온건부르조아세력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후에도 몇 번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특별한 성과는 없었으며 중도정당들이 붕괴되는 과정은 지속되었다. 중도정당들은 경제위기 속에서 점차 첨예해지는 중산층내부의 이해대립을 급진우파의 선동에 반해서 조정하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상공업세력의 지도부 역시 중도정당의 통합운동과 거리를 두어서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르조아세력의 통합운동의 중심이 점점 우익 쪽으로 이전하여 급기야는 극우세력의 연대체인 하르츠부르크전선(Harzburger Front)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또한 나찌당은 1932년의 선거에서 방향성을 상실한 중도정당지지표를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중도정당지지표는 1929/30년까지만 하여도 나찌의 선전선동이 노리던 목표가 아니었다.
2. 기성정당의 노령화
기성정당들은 융통성없이 고착되었던 것은 특정한 사회적 지지기반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기성정당들은 노선의 차이에 상관없이 지나치게 협애한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상상력도 열정도 없는 매력없고 지루한 존재였다. 전반적으로 비합리적인 시대사조에 열광하던 바이마르의 청년세대들은 189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세대와 190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세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1차대전 동안 어린 나이에 전방병사로 참전하여 예기치 못한 패전을 경험한 세대였고, 후자의 경우는 전후의 사회에서 잉여인간이라는 느낌을 받던 세대였다. 기성정당들이 새로운 시대정신과 고민하지 않는 한에는 정당의 고령화는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문제점과 관련해서는 바이마르체제를 담지하던 정당들 중에서 유일하게 독자적인 대중조직을 지니고 있던 사민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6년을 기준으로 사민당당원 중에서 30세이하인 자가 18%였고 40세이하인 자가 45%였던 데 반하여 공산당의 경우에는 1927년을 기준으로 이 수치가 각각 31.8%와 64.5%였다. 동시대의 관찰자였던 지그문트 노이만이 이러한 정체의 원인을 1890년대 이래로 사민당의 노선을 지배하던 일종의 속류화된 실증주의인 카우츠키주의에서 찾은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1930년의 선거에 즈음한 사민당의 정신적 지도자들의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이 거의 학자들이었던 데 반하여 이에 상응하는 공산당의 집회에서 서명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예술가들이었다는 사실"을 의미심장하게 본 것은 노이만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930년에 구성된 라이히하원에서 의원들의 연령구조를 보면 기성정당과 새로운 정당들간의 세대문제는 명료하게 드러난다. 40세이하 의원의 숫자는 사민당의 경우는 143명 중 20명, 중앙당은 68명 중 7명, 독일민족국민당은 41명 중 3명 그리고 독일국민당은 30명 중 2명이었던 데 반하여, 나찌당의 경우에는 105명 중 77명 그리고 공산당의 경우에는 77명 중 55명에 달하였다. 이 두 급진정당의 약진으로 말미암아 40세이하의 의원의 수가 1928년의 라이히하원에서 보다 두배이상 증가하였다. 비례선거제도에서 의원으로 당선되는 데에는 명부에서 안정권의 순위를 받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기성정당이 젊은 세대에 대해서 소홀했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존질서에 대한 젊은이들의 항의분위기가 기성정당에 의해서 소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는 반합리주의적인 시대사조를 극단으로 몰고가서 이용하려는 세력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나찌당의 극적인 도약은 물론 기존정당들의 문제점으로 인해서 반사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이른바 돌격대(Sturmabteilung: SA)의 폭력활동을 위시한 나찌당의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또한 간과될 수 없는 점은 나찌당이 기성정당들이 지녔던 구조적인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했었던 사실이다. 나찌주의자들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진부하게 된 사회집단들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극우민족주의적인 대중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다른 정당들에 비해서 국민정당으로서의 특성을 강하게 띄었다. 나찌당원들의 사회적 구성은 1930년을 기준으로 할 때에 다음과 같았다 (괄호 안의 수치는 각각 전체국민에 대한 비율임) : 노동자 28.1% (45.9%), 사무직종사자 25.6% (12.0%), 자영업자 20.7% (9.0%), 공무원 8.3% (5.1%), 농민 14.0% (10.6%), 기타 3.3% (17.4%). 이 통계수치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영업자, 사무직종사자, 공무원 등의 중산층이 나찌당에 평균이상으로 참여하였다는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는 나찌당이 그 이외의 직능집단, 특히 노동자들의 일부도 획득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당원들의 연령구조상으로 나찌당은 매우 젊은 정당이었다. 1930년을 기준으로 나찌당원 중 거의 70%가 40세 이하였고 37%정도가 30세이하였다. 나찌당은 사회계층의 차이를 넘어서 1890년생 이후의 세대에게 강한 흡인력을 지녔음이 명백하다.
전체적으로 보아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들은 기존의 지지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봉쇄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당체제의 위기증후군이 명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당들은 쇄신의 노력보다는 근시안적인 자기만족에 머물렀다. 어떠한 정당도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러한 상호봉쇄상황을 부수고 사회의 발전상태에 상응하는 새로운 입장을 세우는 용기를 지니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VI. 바이마르정당국가의 헌법학
1. 바이마르헌법학의 반다원주의
위에서 살핀 것처럼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구조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오랜동안의 관헌국가적 지배의 당연한 결과였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에는 어느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입헌군주제에서 의회민주주의에로의 전개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고 정치체제가 지체되었던 카이저제국후반기 이후에는 정당에의 인적 충원마저 공동화현상을 나타내는 등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들이 자신에게 다가온 새로운 과업에 대한 준비가 잘 되어있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의회민주주의에서의 정당의 역할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문화에서는 의회민주주의하에서의 정당국가화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점이 널리 퍼져있었다. 관헌국가적 지배질서하에서 형성된 국가와 정부는 모든 정파 위에 군림하며 특정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공공복리를 대변한다는 사고방식이 고착되었다. 입헌군주체제의 국법학자였던 블룬츌리(Bluntschli)는 정당은 자의로 가입 탈퇴할 수 있는 사회의 집단이므로 국가유기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국법학은 정당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이는 헌법과 국가질서는 정당의 차이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확고한 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당은 사회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을 대표하는 것이고 정당에 의해 구성된 정부 역시 사회의 부분이익만을 대변하여 결국 국가의 통일성을 해치고 분열을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헌국가적 반다원주의전통을 극복하려는 헌법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트마이어(Wittmayer)는 사회의 다양한 특수이익들을 공공복리의 실현에 대한 위협으로 보아 이를 근본적으로 배제하려는 민주주의론은 실제로 기능하는 민주주의의 현실과 부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이익대립이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사회현실 속에서 전래의 공공복리사상이 정치공동체의 결속을 위협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위험은 각각의 특수이익이 경쟁적으로 스스로를 공공복리와 동일시함으로써 절대화됨으로써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익정당이면서도 동시에 세계관정당이었던 바이마르정당들의 문제점과 관련해서도 적절한 지적이었다. 즉 민주주의에서의 공동체는 민주주의라는 국가형태를 형이상학적으로 도덕화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존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괄함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관점은 라트브루흐(Radbruch)에 의해서도 대표되었다. 라트부르크는 정당국가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이론이 아닌 민주주의의 사회학, 즉 정당국가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였다. 라트브루흐가 보기에 헌법학이 이러한 정당국가적 현실에 적응해야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국민과 국가간의 조직된 매개체가 없이는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바이마르헌법학의 주류가 정당국가에 대한 헌법적인 인정을 유보하는 것은 전래의 민주주의론 때문이 아니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관헌국가의 이데올로기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라트브루흐에게서는 당시의 정당국가론에서 흔히 보이는 전체로서의 국가와 부분으로서의 정당간의 긴장관계는 상당히 극복되었다. 민주주의에서 전체성은 그것이 의제적이든 또는 실체적이든간에 상호 경쟁하는 정치적 입장의 피안에서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당국가현상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던 라트브루흐는 당시의 정당체제의 문제점도 정확히 분석 비판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정당의 문제는 라트브루흐가 보기에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던 것처럼 정당들이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정당인 것이 아니라 고도의 확신정당 또는 신념정당인 점이라는 것이었다. 이익갈등은 타협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확신이나 신념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또한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다당제구조를 문제삼는 견해에 대해서는 정당의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정당간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양당제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구조를 의미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의 헌법학에서 이러한 다원주의적 입장은 극히 소수의 견해에 머물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현실을 받아들였던 헌법학자들도 관헌주의적 국가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였다. 바이마르공화국 중반기이후 헌법학의 주된 흐름을 대표하던 온건보수주의자 트리펠(Triepel)은 한편으로는 정당국가화 현상을 예리하게 분석하였지만 이를 헌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유보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다원주의적 정당국가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체계적인 비판을 가한 것은 칼 슈미트였다. 슈미트는 정치적 통일체의 본질은 긴급상황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주권적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국가를 다른 인적 결사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다원주의론은 결정적인 통일체로서의 국가의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슈미트는 출발점에서는 정치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을 구별하였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친구와 적의 구별로 극단화함으로써 국가가 사실상 유일한 정치적인 통일체로 되는 결과를 낳았다. 슈미트의 관점에서는 정당정치가 정치적으로 되는 것은, 모든 정당들의 대립을 상대화 시키는 포괄적인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가 힘을 잃고 국내적인 대립이 국가간의 대립보다 높은 강도를 얻을 때, 즉 내란에 준하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사실상 국가에 독점시키는 헌법이론을 구성함으로써 정당에 대한 헌법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결론을 도출했던 것이다. 이러한 슈미트의 반다원주의적 입장은 바이마르 헌정질서가 위기상황에 봉착하자 보다 적극적으로 되었다. 슈미트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위기를 조직된 사회세력인 정당들에 의해서 국가가 분할된 때문으로 보았다. 문제의 해결은 다원주의적 정당국가화의 경향에 대해서 국가의 내정상의 중립성을 확보하는 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헌법의 수호자인 제국대통령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슈미트의 반다원주의적인 정당국가비판론은 여러가지 다양한 권위주의적 헌법이론의 대표적인 예에 불과하였다. 우리는 슈미트 보다도 한층더 급진적인 반다원주의헌법이론을 헤어파르트(Herrfahrdt), 타타린-타른하이든(Tatarin-Tarnheyden), 코엘로이터(Koellreuter)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정당국가와 관련한 바이마르헌법학에서 논의의 중점은 의회민주주의를 전제로 정당체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지 않고 의회민주주의적 정당국가에 대한 찬반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헌법학의 논의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들이 지니고 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구체적인 기여를 할 수 없었다.
2. 다원주의적 정당국가의 기능조건으로서의 동질성문제
바이마르공화국에서는 좌우의 양대정당간에 권력이 교체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들 정당들이 정부에 참여하기 위해서 중도정당들과 연정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의회의 절대과반수의석을 지니지 못한 것만이 아니었다. 서로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좌우양대정당의 단독정부수립은 극도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되면서 연정을 구성하는 정당들의 능력마저 약해졌다. 이는 물론 전반적인 사회상황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경제사회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인 경영자단체와 노동조합간의 타협이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협력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사회의 조직된 세력들간의 갈등 뿐만 아니라 강력하게 조직된 이해관계와 조직화되지 못한 이해관계간의 갈등도 점차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현실상황 속에서 민주주의를 - 가치상대주의에서 출발하여 - 단지 다수결의 원칙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이마르공화국의 현실에서는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관이 통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법론적으로 유연하게 사고하던 국법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여 이를 동질성(Homogenitat)개념과 관련하여 논의하였다. 동질성개념이 논의의 주제가 된 배경은 당연히 새로이 형성되고 감지되는 사회의 이질성이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시민사회에서 대중사회로의 이전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였다.
슈미트는 동질성개념을 정치적이고 실체적으로 이해하여 이질화된 상태를 국민적 평등을 강화함으로써 극복하려 하였다. 헬러(Heller)는 이처럼 국민적 차원을 지향하는 슈미트의 동질성개념의 배경에 19세기에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기초였던 시민계급의 문화헤게모니를 복구시키려는 의도가 있음을 간파하였다. 슈미트에 반하여 헬러는 대중사회에서 장기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치문화의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이 새로운 정치문화는 시민계급이외의 세력, 특히 노동자들에게도 우리라는 의식(Wir-Bewußtsein)에의 동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을 창출하는 새로운 정치문화는 일정정도의 사회적 동질성이 형성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라이프홀츠가 헬러의 동질성개념에 접근하는 입장을 표명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시점에서의 라이프홀츠의 견해에 의하면: 의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 것은 그것이 다원주의적으로 분할된 사회세력의 무대로 되어 단순히 사회경제적 이익대표의 장으로 화한 때문이 아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내용을 상실하여 ... 의회민주주의의 기능조건인 정치적 사회적 동질성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동질의식은 원래 바이마르헌법이 탄생하던 때에는 서로의 이해를 조정할 자세가 되어 있던 노동자와 시민계급의 공동전선 속에 존재했었다." 라이프홀츠의 이러한 입장 표명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이른바 프로이센적인 정통보수주의의 흐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보수주의적 헌법학의 일각에서 다원주의적 정당국가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입장이 단초적으로나마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정치, 경제, 학문의 영역에서 상호 갈등하던 세력들이 접근하여 공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은 12년의 나찌집권이 끝난 후에야 계속될 수 있었다.
VII. 바이마르정당국가의 좌절이 주는 교훈
우리나라에서 민주헌정국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국민 속에 깊이 뿌리내려서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국민정당이 최소한 두개는 필요할 것이다. 최근에 서구에서 대두되는 정당국가비판론은 정당국가자체를 비판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정당국가의 문제점, 특히 정당이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것이 과장되어 받아들여질 필요는 없을 듯하다.
독일의 정당구조와 행태는 입헌군주제하에서 그 기초가 형성되었다. 입헌군주제하에서의 정당은 정치체제 내에 편입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정부구성에서 배제됨으로써 정치체제의 주변적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성된 정당의 특성들은 정당에게 중요한 역할이 부여되는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쉽게 극복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의 정당체계의 형성과정은 구체적으로는 독일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오랜 기간의 권위주의적 지배질서하에서 형성된 정당체계가 민주화된 헌정질서 속에서 바람직한 역할을 찾아가야 하는 점에서는 공통된 배경과 과제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이마르정당국가의 기능을 어렵게 했던 중요한 이유는 오랜 관헌국가적 지배질서 속에서 사회주의세력과 종교적 소수파였던 카톨릭세력이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이들 역시 명실상부한 정치체제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지만 여러가지 문제가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민주헌정국가의 선결과제 역시 배제되어 왔던 정치세력들을 통합해 내며 이들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분모를 확보해 내는 일일 것이다.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은 항상 사회를 탈정치화시키려 노력한다. 현대산업사회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지 못하는, 지역이라는 요소가 현재 우리나라 정당구조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은 현대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예민한 요소들이 정치화되는 통로가 막혔던 우리의 헌정사의 반사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지역정당구조를 사회적 지지배경에 고착되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체제와 동일선상에서 논의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경우가 모두 지지기반의 정당에 대한 지니친 충성심으로 인해서 바람직한 정당정치의 전제인 정치"엘리트간의 불확정적인 경쟁"을 저해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기본적인 해결방안은 그동안 억제되어 온 사회의 정치화경향에 물꼬를 터주고 이를 제도화하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현행 실정법상의 정당활동이나 정치활동에 대한 광범위한 법적 제한도 이러한 측면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구조를 통해서 우리는 고도로 산업화된 대중사회에서 다원주의적 정당국가가 민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넘어야 할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다원적 민주헌정국가에서는 사회의 부문이익들이 정치화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헌정국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들간의 타협이 제도적으로 체질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갈등이 이데올로기화하고 전부냐 전무냐의 문제로 확산된다. 바이마르헌정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현대다원주의사회에서 헌정국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이익갈등이 존재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해결할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는 정치문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헌법전 속의 자구들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전제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함을 바이마르헌정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송석윤 (대전대학교 법학과)
I. 머리말
1. 연구의 대상과 목적
이 글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정당구조를 살피고 이와 관련된 헌법적인 문제들을 봄으로써 상대적으로 짧은 헌정사를 지닌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발전에 귀감으로 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독일의 근현대헌정사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서유럽이나 북미에서와는 달리 경제적 성장이 정치적 민주화로 연결되지 않고 오랜동안의 지체를 경험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산업혁명 이후의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군주정으로부터 의회민주주의에로의 전환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입헌군주제라는 관헌국가적 지배질서가 20세기초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성립은 이러한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의 비동시성이 처음으로 극복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독일의 헌정사적 경험이 흔히 "개발독재"라고 불리우는 권위주의체제 하에서 경제성장이 이루어 지고 이제 정치적인 민주화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헌법정치적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정당구조와 관련한 바이마르헌정사는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원주의화경향과 그에 따른 이익갈등의 문제에 직면해서 민주적 정당국가의 헌법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부과하고 있다.
2. 연구의 방법
독일 바이마르헌법은 흔히 본(Bonn)기본법의 쓰여지지 않은 한 부분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민주적이라고 일컬어 졌던 바이마르헌법에 기반하였던 민주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던 경험이 제2차대전 이후의 독일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녔던 것을 보여준다. 바이마르공화국은 오랜 입헌군주제적 헌법질서를 극복하고 독일헌정사에서 최초로 의회민주주의를 건설하였다. 이는 동시에 그 동안 성장하여 온 정당들이 직접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통치의 주체가 되었던 정당국가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이마르공화국의 실패는 정당국가의 실패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의 역사학자와 헌정사가들은 바이마르 정당국가의 실패원인을 규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것을 새로운 민주주의의 건설에 참고하려 하였다. 하지만 1950년대와 60년대의 연구결과들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이후의 보다 실증적인 연구를 통하여 역사현실에 맞지 않는 "신화"로 판명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바이마르공화국이 실패한 것은 잘못된 헌법때문이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헌법의 문제를 살핌에 있어 현실적인 배경을 도외시하는 방법론적인 접근방식에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바이마르의 역사가 바로 나찌의 집권과 연결되었고 따라서 50년대와 60년대 연구자들의 상당수가 동시대인으로서 역사연구에 필요한 적정거리를 유지하지 못하였던 데에 보다 깊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인적 과거청산과 과거와의 단절이 이루어 졌지만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일 바이마르민주주의의 실패원인을 헌법이 규율대상으로 삼았던 사회나 그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보다는 헌법 자체에서 찾아내던 분위기 속에서 주로 제기되었던 문제들이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의한 정당난립, 헌법상의 직접민주제적 요소의 도입, 제국대통령의 비상대권 등이었다. 독일 헌정사과 그에 기반한 독일 헌법이론이 우리나라의 헌법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바이마르민주주의 붕괴의 원인을 몇개의 헌법상의 제도에서 찾는 단순논리는 보다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상대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이마르헌정사에서의 정당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구체적인 정당현실을 분석하는 역사학적인 접근이 기본이 될 터인데, 특히 정당구조를 사회구조와 연결하여 이해하려면 그중에서도 사회사적인 접근이 유용할 것이다. 또한 고도로 발달한 다원주의적 정당국가에서의 민주주의의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려면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정치문화를 규명하는 정치학에서의 작업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바이마르 헌법학설을 고찰하게 될 것인데, 이는 결국 헌정사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규명하는 데에는 학제간의 연구가 불가피하다는 방법론적 필요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3. 연구의 개요
이러한 문제의식하에서 이 연구는 바이마르공화국 정당의 체제와 특성 및 그것이 지닌 문제점을 살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바이마르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나찌가 집권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후에는 바이마르정당국가에 대한 헌법학에서의 논의를 다원주의론과 동질성개념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바이마르의 정당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II.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구조
1. 11월혁명과 정당국가적 의회민주주의의 탄생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이 확실해지면서 의회에 진출해 있던 독일의 정당들은 기존의 입헌군주제(konstitutionelle Monarchie)헌법을 의회군주제(parlamentarische Monarchie)헌법으로 개정함으로써 전후의 상황에 대처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당들의 시도는 1918년 11월혁명의 물결 속에서 민중의 요구에 의해 공화국이 선포됨으로써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혁기에서 정당은 일단 정치적 사건들의 전면에서 물러나 있게 된다. 하지만 혁명의 결과가 의회민주주의의 선택으로 귀결되자 정당은 정치무대의 전면으로 대두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의회민주주의에서 정당은 더이상 단순히 정부에 대해 사회를 대표하는 입장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이제 정당은 자신의 당원을 국가의 영역으로 파견하여 국가기관을 조직하고 창조력과 책임감으로 정치를 주도해야 했다. 의회민주주의의 성패는 정당의 기능여하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의회민주주의로의 결정은 동시에 - 당시의 사람들이 충분히 인식하였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 정당국가로의 결정이었다.
바이마르정당체제의 기본구조는 그 이전의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상당한 연속성을 보이므로 먼저 19세기에 독일의 정당체제가 형성되는 모습을 살피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2. 독일입헌주의하에서의 정당체제의 형성
독일에서 정당이 상대적으로 되늦게 형성된 것은 의회제도의 정착이 상대적으로 지체된 결과였다. 정당이 정치운동 속에서 느슨하게 조직된 그룹으로서의 초기형태를 극복하고 비약하게 된 것은 1848/49년의 혁명을 겪으면서였다. 이 때에 원내교섭단체로서의 정당의 원내조직과 이른바 "정치적 결사"(politische Vereine)로서의 정당의 원외조직이 공고해 진다. 이미 1848년 삼월혁명 이전 시기에 형성되어 있었던 다섯가지 정치적 경향의 구별이 더욱 뚜렷해진 것도 이 때였다. 이제 민주적 시민계급, 자유주의적 시민계급, 정치적인 카톨릭주의, 보수주의 그리고 노동운동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었던 것이다. 정당의 조직적 발전은 혁명이후의 반동기에 일시 정지되거나 후퇴하지만, 독일제국성립 이전의 약 10년동안 새로이 결정적인 부흥기를 맞이한다. 자유주의세력은 이 시기에 특히 프로이센의 군대 및 헌법갈등(Preußische Heeres- und Verfassungskonflikt)을 계기로 정치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관료주의적인 관헌국가의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허약함을 드러내었고, 당대인 핵심문제였던 민족통일의 과제를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기본적으로 비스마르크의 성공적인 외교정책을 통해 추진되었던 독일의 민족통일과정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패배를 겪으면서 자유주의세력이 1866/67년에 좌파자유주의자와 민족자유주의자로 분열되었다. 이는 독일자유주의의 분열이 취종적으로 고착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정치발전과정에 있어서 자유주의세력의 주도력결여로 인해서 독일정치가 전반적으로 국민전체를 상정하는 정치로부터 계급정치로 이행하는 것이 촉진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정치적 카톨릭주의가 정치적 자유주의로부터 이탈하는 시기가 앞당겨졌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시민적 민주주의로부터 이탈하는 단초는 이미 1848/49년 혁명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노동운동이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인 목표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에 비해서 강력한 국가지향성을 띄었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 자각하면서 사회적 요구를 강화시키는 것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이 상반된 감정이 병존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계속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과정이 종지부를 찍은 것은 70년대 초반에 자유주의자의 다수가 이미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에 동화된 것이 명백해진 시점이었다. 통일과정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이른바 민족문제의 소독일주의적인 해결로 인해서 카톨릭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적-북독일적 특징을 지닌 독일제국에서 종교적인 소수세력이 되었다. 1870년대 초에 정치적 카톨릭주의는 새로운 대중정당인 중앙당을 세운다. 이 정당이 성립되어 결속하게 되는 데에는 비스마르크가 주도하고 자유주의자들이 지원했던 문화투쟁에서의 카톨릭에 대한 억압적인 분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치적 카톨릭주의정당과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형성되고 뿌리를 내리는 1870년대 중반에 이르면 다섯개의 흐름으로 대별되는 독일의 정당체제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정당체제의 근간은 카이저제국 기간동안에 합병, 분열, 당명변경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채 남아 있었고 바이마르공화국으로 이행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는데, 이는 좌파자유주의, 민족자유주의, 카톨릭중앙당, 자유보수주의와 독일보수주의로 분열된 보수주의자 및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으로 구성되었다.
3. 바이마르공화국 정당체제의 연속성
(1) 5개 유형의 정당체제
입헌군주제에서 의회민주주의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독일정당들의 기본구조는 주목할 만큼의 연속성을 보였다. 정치적 변혁으로 인해서 일련의 새로운 창당작업이 있었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그 이전의 정치흐름들이 본질적인 변화없이 그대로 존속하였다. 카이저제국에서는 독일보수당(die deutschkonservative Partei)과 독일제국당(die deutsche Reichspartei)으로 양분되었던 보수주의세력은 1918년 11월 24일에 독일민족국민당(die Deutschnationale Volkspartei)을 창당하였다. 군주제로의 복귀를 정강정책으로 하던 독일민족국민당에는 기독교사회적(christlichsozial) 세력, 독일국수주의적(deutschvolkisch) 세력, 반유대주의적(antisemitistisch) 세력 등 다양한 집단들이 참여했다. 한편 단일한 자유주의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협상이 실패한 후인 1918년 12월 5일에는 자유주의우파 중에서 슈트레제만(Stresemann)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독일국민당(die Deutsche Volkspartei)을 세웠다. 독일국민당의 정강정책은 공화국이라는 국가형태에 대해서 유보적이었다. 자유주의좌파세력은 기존의 자유주의우파세력의 일부와 함께 1918년 11월 20일에 독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정치적 카톨릭주의세력에게는 새로운 창당이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존의 카톨릭중앙당이, 잠시 기독교국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존속하였다. 하지만 카톨릭중앙당은 같은 카톨릭세력에 기반을 두면서도 연방주의적 성향을 강조하는 바이에른국민당(die Bayerische Volkspartei)이 1918년에 창당되고 1920년에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독일사회민주당(die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으로 집중되어 있던 노동운동세력에게도 정치적 카톨릭주의와 마찬가지로 강한 영속성이 나타났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사민당은 노동운동세력의 유일한 정치적 대표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분리되었던 독립사민당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1920년에 독립사민당의 좌파가 그 사이에 창건된 독일공산당에 참여하고 독립사민당의 우파가 사민당으로 재합류한 이후부터 바이마르공화국이 붕괴되기까지 사민당과 공산당이라는 두개의 노동자정당이 양립하는 구조가 지속되었다.
(2) 군소정당
이러한 다섯가지의 주된 흐름을 제외하고도 다수의 군소정당(여기서는 선거득표율이 4%미만인 정당을 의미함)이 있었던 형편은 카이저제국 때와 다르지 않았다. 1912년의 라이히하원 선거결과 전체 397석 중에서 28석을 점하고 있던 소수민족정당들은 베르사이유조약에 따라서 영토가 줄어든 관계로 한두석 정도의 의석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나찌주의자들 역시 1930년이후의 도약이전까지는 군소정당에 속하였다. 일시적으로 적지 않은 세력을 보여 주었던 정당으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한 경제당(die Wirtschaftspartei)을 들 수 있다. 경제당은 1928년과 1930년의 선거에서 각각 4.5%와 3.9%의 득표율로 23석을 획득했었다. 군소정당의 득표율은 전체적으로 보아 우선은 카이저제국에서(1912년 13.6%) 보다 감소하였다가(1919년 1.3%) 1920년부터 다시 증가하여(5.1%) 1930년에는 20.8%로 최고치에 이르렀다. 1932년의 선거에서 기존의 군소정당들에게 행해지던 투표의 상당부분이 나찌당으로 흡수되면서 이 비율은 다시 8%로 내려갔다. 이러한 군소정당의 전개양상으로부터 유권자의 정당선호의 변화를 분석하는 중요한 지표들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 하에서 군소정당의 역할은 몇 개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기본적으로 그리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입헌군주제하에서 형성되었던 정당체계가 물론 위기상황의 징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28년경까지는 본질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었다.
(3) 당내 권력구조의 불변
혁명이 발발한 후 몇달동안은 각 정당들 내부에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중도 내지 우파정당에서 뚜렸했다. 지금까지 기존정당 내에서 좌파적인 경향을 지니던 정치인과 당내파벌들이 정당지도부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톨릭중앙당에서는 에르츠베르거(Erzberger)가 정당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고 또한 카톨릭노동운동출신의 정치인들의 당내입지가 강화되었다. 독일민주당의 지도부에서는 창당을 주도하였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밀접한 협력관계를 지향하던 그룹이 자유주의좌파정당의 전신이던 진보국민당(die Fortschrittliche Volkspartei)의 지도부에서 보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보수주의정당인 독일민족국민당에서조차도 독일보수주의의 반동적인 노선을 지향하던 정치인들은 우선은 뒤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 정당 내에서의 권력중심의 이동이 지속적이지는 못하였다. 당내 우파에 속하던 구세력들은 1920년경에 이르면 잃었던 당내지위를 상당부분 회복하게 된다.
우파세력이 혁명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을 유지했던 정치상황의 전개에 대해서 사회주의세력은 실망하게 되었다. 이것이 날로 급진화하던 독립사민당과 공산당이 사민당의 지지기반을 잠식하며 노동자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좌파로부터의 압력은 다시 사민당우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이마르정당구조가 양극화하는 전제조건은 이미 초기부터 주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 정당의 사회적 기반
(1) 이익정당화 대중정당화현상과 그 문제점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정당들에 있어 근본적으로 새로운 조건은 정치적인 경쟁이 훨씬 민주적으로 되었다는 점이었다. 지방선거에서는 여전히 남아있던 상류계층의 선거법상의 특권은 사라졌으며, 이전의 친정부적인 세력들은 더이상 선거에서 국가행정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대중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중도 내지 우파정당들은 독자적인 대중조직을 구축하는 노력을 배가하여 "통합정당"(Integrationspartei)으로 변신하려 하였다. 정당들이 당명을 정함에 있어 스스로를 즐겨 무슨 "국민당"(Volkspartei)이라고 부르는 유행으로부터 이러한 분위기의 징표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양상은 이미 카이저제국에서 시작되었던 정당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대중조직이 상호연대하는 현상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였다. 독일의 정당체제는 그 형성시부터 주로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정당구조는 1870년대말의 경제정책과 국내정치의 전환과 함께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1873년에 시작된 경제위기는 농업의 구조적인 위기에 의해서 더욱 심화된다. 이러한 경제위기에 직면해서 특히 보호관세정책을 중심으로 한 갈등과 관련하여 경제정책에 대한 이해대립이 첨예화되고 이는 정치적 대결로 전화되었다. 이는 정당활동의 중점이 헌법정치적인 문제로부터 멀어져서 경제사회적인 이익대표로 축소됨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의회의 정치적 잠재력을 약화시키고 민족자유주의자를 분열시키려 하였던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의해 의식적으로 조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당의 변화는 또한 강력한 이익단체의 등장에 의해서 촉진되었다. 이들 이익단체는 보호관세와 관련된 투쟁의 과정에서 성립하여 곧이어 정치영역에서 정당과 경쟁하게 된다.
이처럼 정당들이 정당정책적으로 사회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지향하게 되는 것 이외에도 1890년대 초반에 이르면 정당의 조직분야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 지금까지 비사회주의 부르조아정당들은 선거운동에서만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명사집단에 의지했었고 어떠한 원외의 대중조직도 지니지 않았었다. 하지만 1889/90년 파업의 물결 이후 사회민주당이 노동조합과의 연계 속에 대중조직을 확보하게 되자 이들 정당들도 항시적으로 활동할 대중정당으로의 조직적인 변신을 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보다 깊은 이유는 경제적 위기를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국민의 범위가 넓어진 데 있었다. 농업분야에서의 위기는 특히 심각해서 새롭게 결성된 농민단체의 주도하에 특히 강력한 대중운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신흥 이익단체들은 자신들의 대중조직을 정당기구가 없던 기존의 명사정당에 제공하면서 정당에 대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정당의 이러한 이익정당으로의 정강정책상의 변화와 대중정당으로의 조직상의 변화는 산업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유권자의 이해관계다변화와 정치화의 부득이한 결과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정당이 정부를 구성하여 통치의 책임을 지는 길이 막힌 상황에서 기존의 정당체제가 유지되는 속에서 진행되었고, 이는 정당들이 상대적으로 폐쇄된 각자의 사회적 지지기반에 고착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었다. 정당정치의 기초가 세계관에서 이해관계 바뀌고 그와 함께 개별정당의 정치적 의미도 변화했지만 독일의 정당체제 전반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다. 이처럼 정당의 발전이 정체된 상황은 장기적으로 보아 정치의 진전된 의회주의화라는 헌법정치적인 관점에서 정당들을 포괄하는 연대의 형성이나 보다 넓은 사회적 지지기반을 지닌 국민정당으로의 발전을 저해했다.
(2) 사회적 지지기반의 고착화와 그 붕괴의 징후
앞에서 살핀 대중정당화의 경향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개상황 속에서 이미 카이저제국 시대에 결속력이 강한 사회배경에 기초하는 대중적 기반을 지녔던 정당들은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카톨릭중앙당은 계속해서 카톨릭세력에 기반을 둘 수 있어서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사민당 역시,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분열로 지지기반의 일부를 공산당에게 내주었지만, 여전히 노동자세력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보수주의정당인 독일민족국민당은 전쟁이전의 보수주의정당과는 달리 더이상 엘베강동쪽의 대토지소유자와 농민단체인 농민연맹(Bund der Landwirte)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독일민족국민당은 개신교회와 농민단체와의 기존의 연대를 넘어서 "전독일연맹"(Alldeutscher Verband)이나 "철모, 전선병사동맹"(Stahlhelm, Bund der Frontsoldaten) 등과 같은 국수 민족주의적인(volkisch-nationalistisch) 집단들과의 밀접한 연계를 추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양태로 존재하던 극우민족주의세력들은 전쟁과 전후의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에서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독일민족국민당은 적어도 나찌당이 약진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극우민족주의적인 세력을 확고한 기반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언급한 정당들과는 달리 자유주의정당들은 원외의 대중조직들과의 밀접한 연계를 확보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자유주의정당에 투표하는 유권자들이 워낙 다양하고 이질적이었던 때문에 하나의 결속력있는 집단이 나올 수가 없었다. 자유주의정당들은 바이마르공화국 초기까지는 어느정도 과거의 지지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1924년부터는 유권자를 모으는 통합력을 급격하게 상실하게 된다.
바이마르정당들이 지녔던 이러한 기존의 - 또는 부분적으로 공화국초기에 새로이 보완한 - 사회적 기반에는 이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 카톨릭중앙당의 경우에는 헌법제정국민회의의 선거에서는 새로운 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지지기반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기존의 지지율을 상회하는 선거결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1920년부터는 이미 카이저제국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완만하지만 지속적인 하강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정당들의 득표율도 1920년에는 1912년선거의 수준으로 떨어져서 그 이후에는 구조적인 득표율상승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보수주의정당에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경제위기하에서 치러진 1924년의 선거에서 자유주의정당의 지지기반이던 도시유권자들의 항의성 투표를 획득하였던 것을 예외로 한다면 보수주의정당도 전쟁이전의 득표율을 대체로 유지하는 데에 그쳤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자면 이미 전쟁 전부터 존재했던 각 정당들과 특정 사회집단들과의 밀접한 연관성이 바이마르공화국이 생성되던 이행기에서의 일시적인 변화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이마르정당들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의 외연을 확장하려 노력하는 것보다는 사회 경제적인 제이해관계들과의 기존의 관계를 공고히하는 데에 주력했던 것이었다.
III. 정당들의 세계관정당적 성격과 연정형성의 문제점
1. 독일정당의 세계관정당적 성격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정당구조가 대중조직을 지닌 이익정당으로 변하는 상황이 지속되었지만 이로써 독일정당이 그 탄생부터 지니고 있었던 세계관정당으로서의 특성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수이익들은 입헌군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념들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당들은 사회의 이해대립을 주도적으로 중재하여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지니지 못하였다. 정당은 오히려 이해관계가 정치화하는 과정에서의 형식적인 중간정거장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이해대립의 세계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이를 강화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일반국민들이 정치에 대해서 만병통치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당이 독자적인 주도권으로 이러한 기대를 합리적으로 유도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한에는 국민들은 정책결정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의회민주주의하에서의 정책결정은 다양한 이해와 입장들간의 타협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정당들이 지니고 있었던 세계관정당적인 특성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부분적으로는 강화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따라서 타협을 해야하는 정당의 활동공간을 제약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극우 및 극좌의 입장에서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던 정당들에게는 항의투표를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들에서 발견되는 세계관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성격은 사실 오랜 뿌리를 지닌 것이었다. 19세기에 독일에서 정당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이미 관료와 군대라는 고도로 발달된 국가의 "기간조직"이 오래전부터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은 후였다. 이에 반하여 정당들은 초기에는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지니지 못하였고 거의 전적으로 소수의 교양시민계층에 의지해야만 했다. 정당의 방향을 결정했던 정치철학의 흐름들도 국가기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독일정당들은 그 생성기에 있어 정치에 대해 책임있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당들은 세계관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라이히헌법에 의하면 정당의 주된 활동영역인 의회는 입법과정에 참여하는 권한은 갖지만 정부구성으로부터는 배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당은 정치권력획득을 위한 투쟁에서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사회 경제적 대립의 조정작업이나 정부정책에 대한 찬반의 입장표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당은 카이저제국 기간 동안에 정치과정에서 점차 더 많은 역할을 하게 된다. 동시에 독일정당은 기존정치질서에 대해 묵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적응하고 또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연계를 맺는 과정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기도 한다. 하지만 헌법구조적으로 정당이 통치의 책임을 지는 것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던 한에는 독일정당이 지녔던 원리주의적인 성격은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단지 새로운 요소와 중첩될 뿐이었다. 정당의 분열, 정당 간의 안정된 협력관계의 공고화의 어려움, 첨예한 당내노선투쟁 등 카이저제국의 정당들이 지녔던 문제의 원인은 직 간접적으로 독일정당에 내재하고 있던 세계관적 원리주의적 특성에 있을 것이다. 정부의 구성을 의회가 주도하는 의회민주주의로의 전개가 정체된 상황에서에서 정당이 젊은 정치지망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활동공간이 넓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정체상황이 명백해진 카이저제국 후반기에 정당들은 인력충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 문제점은 후에 바이마르공화국시대에 정당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입헌군주제하에서는 정당들이 반드시 의회에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다수를 형성할 필요가 없었다. 정당들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대해서 야당의 역할을 하였고 이에 익숙해 있었다. 입헌군주제하에서 형성된 이러한 역할인식이 공화국으로의 이전에도 불구하고 남아있었다. 정부를 구성하는 데에 참여한 정당들은 야당들의 공격에 대해서 정부의 지원세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정부를 비판하는 의회야당역할을 하였다.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정당들의 내각에 대한 입장이 당내의 권력구조가 수시로 변하는 것에 따라서 바뀐다면 예측가능한 일관된 정책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바이마르공화국의 기간 동안에 출신정당의 결속된 지원을 받으며 정부에 참여할 수 있었던 정치인은 전혀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 정도였는데, 자유주의우파정당인 독일국민당 내에서의 그의 지도적 입장도 항상 안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정당들의 이러한 역할인식은 정당들에게 여전히 남아있던 세계관정당적인 특성과 함께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연립정부들이 허약하고 불안정했던 원인을 제공하였다.
2. 연정구성의 어려움
정부를 구성하는 다수정당과 체제내적인 야당들간의 정권교체라는 의회주의 특유의 기능방식은 바이마르공화국 동안에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미 헌법제정국민회의에서부터 바이마르연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정당들(독일민족국민당, 독립사민당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독일국민당)은 정부의 정책 뿐만 아니라 정치체제의 기초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920년 7월선거에서 바이마르연정이 과반수의석을 상실함으로써 더욱 심각해졌다. 이 선거에서 기존에 연정을 구성하였던 사민당, 독일민주당, 카톨릭중앙당의 의석비율이 78%에서 44.6%로 급전직하했던 반면에 야당들은 많은 의석을 추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거결과는 직접적인 계기는 쑼과 뤼트비츠의 쿠데타시도(Kapp-Luttwitz-Putsch)에 따른 정정불안으로 여당들이 신뢰를 상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깊은 이유는 이미 1919년부터 새로운 헌법질서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좌우의 반체제세력들이 정비되고 강화되었던 데에 있었다. 바이마르연정의 정당들이 더이상 의회의 다수를 점하지 못하게 되면서 1920년이후에는 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세가지로 제한되었다. 첫째의 가능성은 "부르조아동맹"(Burgerblock)이라고 불리우던 중앙당과 독일민주당으로부터 독일민족국민당까지의 연정이었고, 두번째의 가능성은 사민당으로부터 독일국민당까지의 정당을 포괄하는 대연정이었고, 마지막의 가능성은 중도우파정당들의 소수내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가지의 가능한 방식 중 어떤 것으로부터도 안정된 연정이 구성될 수 없었다. 앞의 두가지의 경우에는 외교정책과 경제사회정책의 기본노선에 대한 반목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도정당들의 소수연정은 사민당이나 독일민족국민당의 지원 또는 최소한도의 인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부는 주어진 현안에 따라서 항시 변하는 다수의 지원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연정구성의 문제점은 기본적으로 연정을 구성하는 주체인 정당의 수시로 변하는 정책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연정구성과 관련하여 특히 어려움을 겪은 것은 좌우 양익의 정당인 사민당과 독일민족국민당이었다. 사민당은 - 1924년의 수개월 동안을 제외하고는 - 1932년까지 라이히하원에서 최대의 원내교섭단체였으며 동시에 바이마르공화국이 붕괴되는 시점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헌법이 부여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민당의 역할은 자신이 점하는 정치적 중요성에 미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의회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 사민당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충족될 수 없었다. 바이마르공화국으로의 이행과정에서 다수사민당은 자유민주주의적인 경기규칙에 기초하여 노동자와 시민계급이 공존하고 협력하는 체제로의 정치적 결단을 내린 바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사민당이 자신의 의석수에 상응하여 정부구성에서 적극적으로 지도적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사민당의 유보적 자세가 증대되었다. 1920년의 선거패배 후에 사민당은 연정에서 이탈하였다. 독립사민당의 좌파가 공산당과 연합하고 잔류세력이 사민당으로 재통합됨으로써 사민당내의 좌파가 강화된 후에는 사민당은 부르조아정당들과의 연정구성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기본적으로 시민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최종목표를 추구하는 강령과 브루조아정당들과의 협력이 불가피하였던 정치의 현실과의 괴리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1년의 괴어리츠강령(Gorlitzer Programm)은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화하려는 개량주의노선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1925년의 하이델베르크강령(Heidelberger Programm)에 의해서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이렇게 해서 사민당은 원칙의 문제와 권력의 문제 사이에서 명료한 균형점을 찾는 데 실패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이 - 특히 외교정책상의 문제일 경우에는 극우민족주의적인 우파세력의 반대로 - 사민당의 협력없이는 결정될 수 없었으므로 사민당은 온건부르조아연정을 직접 참여하지 않은 채로 지원하였다. 이로써 사민당은 야당의석에 앉아 있는 절반의 여당이라는 매우 복잡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사민당은 라이히에서와는 달리 오토 브라운(Otto Braun)의 지도하에 카톨릭중앙당 및 독일민주당, 그리고 때로는 독일국민당과 함께 안정된 연정을 지속하여 바이마르공화국의 안정에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우익정당인 독일민족국민당은 연정구성에 있서 더욱 복잡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독일민족국민당은 한편으로는 의회민주주의라는 체제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지지세력의 이해관계를 대표하기 위해 현존하는 정치공간에서 가능한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당은 일관된 반체제와 바이마르체제와의 제한된 협력이라는 두가지 선택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1924년이후 정세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독일민족국민당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이익단체들로부터의 중도부르조아정당과의 연정에 참여하라는 요구가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일민족국민당은 1925년과 1927년에 부르조아동맹내각에 참여하였다. 독일민족국민당의 공화국체제에 대한 이러한 접근과정은 1928년에 철저한 반바이마르노선을 추종하던 후겐베르크(Hugenberg)가 당내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온건세력이 당을 떠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독일민족국민당이 나찌당과의 협력노선을 추구하면서 부르조아동맹에 의한 정부구성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카톨릭중앙당의 경우는 카톨릭을 종교로 지닌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좌우파의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중앙당은 이러한 유연성 때문에 1919년의 헌법제정국민회의부터 1932년에 중앙당출신의 수상이었던 브뤼닝(Bruning)이 실각할 때까지 모든 라이히정부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연정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하였다. 중앙당 내부의 당권은 바이마르공화국이 경과하면서 점차 우경화하여 1928년에는 보수적인 신부인 카스(Kaas)가 당수로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양상이 라이히대통령주도로 구성된 브뤼닝내각 치하에서 더욱 가속화되면서 사민당과 협력하려는 노선은 극도로 약화된다.
두개의 자유주의정당들은 사민당과의 연정을 회피하던 독일국민당의 우파를 제외하고는 세가지의 연정구성방식에 모두 개방된 입장을 취하였다. 문제는 오히려 자유주의정당의 전통적인 지지세력이 점차 붕괴하는 것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초기만해도 20%를 상회하던 두 자유주의정당의 득표율합계는 1928년까지 약 3분의 2로 줄었다가 1932년에는 전체투표의 2%수준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자유주의정당에 대한 투표행태의 변화는 1920년에는 독일민주당에서 독일국민당으로 이전하는, 즉 자유주의정당간에 이전하는 양태로 나타났지만, 1924년에는 자유주의정당의 지지표가 독일민족국민당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유권자들의 대다수는 1928년선거에서 독일민족국민당을 떠나지만 이들은 다시 자유주의정당으로 돌아오지 않고 의회민주주의에 비판적이던 중산층정당이나 농민정당 등 군소이익정당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중도자유주의정당들의 약화로 인해서 당해 정당 뿐만이 아니라 전체 정당체제가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상황 속에서 좌우양익의 정당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설사 한 정당이 과반수의석을 차지하였다고 하여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좌우양익정당인 사민당과 독일민족국민당의 상호불신으로 인해서 이러한 정부구성은 정국의 불안을 야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중도정당들은 연립정부의 정책이 노동자세력과 브루조아세력이 정치적으로 생존하는 기초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보장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좌우양익정당들의 입장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상호 최소한도로 인내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정당의 약화는 동시에 정치제제 전반의 양극화에 대한 안전보장수단의 동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3. 정당체제의 양극화와 의회민주주의의 위기
정치체제의 양극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1928년의 선거결과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선거에서 사민당이 약진한 반면에 브루죠아동맹연정에 참여했던 정당들은 모두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이 선거결과에 따르자면 사민당의 주도하에 대연정을 하는 것이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이른바 브루조아동맹은 더이상 과반수의석을 지니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독일민족국민당은 이 선거 이후에 명백한 반바이마르노선을 선택하였다. 또한 중도정당들이 소수내각을 구성하는 것은 전체유권자의의 4분의 1만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들의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정치적으로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사민당과 독일국민당 간에 난항을 거듭하던 협상 끝에 사민당의 헤르만 뮐러(Hermann Muller)를 수반으로 하는 대연정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 대연정의 존속기간동안 내내 연정 내의 좌우익정당간에 노선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한편으로는 슈트레제만이 1929년에 사망한 후에 독일국민당이 우경화하면서 더욱 심각해 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민당 역시 사회파시즘이론에 기초한 공산당의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지지기반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유연성을 발휘하는 데에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였다.
대연정은 1930년 3월에 실업보험제도를 개선하는 문제에 대한 사민당과 독일국민당과의 협상이 결렬되는 것을 계기로 종료되었다. 대연정붕괴의 원인으로 사민당의 전술적인 미숙함과 의회주의현실에 대한 사민주의의 장기적인 복안의 부재도 간과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 최후의 의회주도정부가 실패한 보다 깊은 원인은 부르조아세력이 우경화하면서 사민주의와의 협조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해진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적인 경기규칙을 지키는 한에서 사민당의 참여를 배제한 정부구성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회민주주의체제를 포기하는 정치적 대안이 점차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대안은 이미 대연정이 붕괴되기 이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중심은 라이히대통령인 힌덴부르크와 그의 주변세력 및 군부지도자인 슐라이혀장군 등이었다. 의회민주주의의 대안을 찾으려는 작업은 어차피 의회민주주의에 기반을 두지 않았던 정치적 우파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이해세력을 넘어서 점차 정치적 중도파 및 공업을 기반으로 한 이해세력에서도 적지 않은 호응을 얻어 가게 되었다.
IV.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위기와 정당국가의 붕괴
1. 브뤼닝내각과 바이마르정당의 약화
대연립정부가 퇴진한 사흘 뒤인 1930년 3월 30일에 브뤼닝의 대통령내각(Prasidialkabinett)이 등장하였다. 이로써 용의주도하게 의회와 정당을 정치체계로부터 배제하려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동시에 수많은 헌법침훼(Verfassungsdurchbrechung)를 동반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브뤼닝내각은 부르조아정당들 출신의 정치인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의회다수의석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의회해산을 위협하든지 또는 라이히대통령의 긴급명령을 통해서 자신의 정책을 관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6월에 의회가 해산되었다. 의회해산 이후 9월에 실시된 선거는 경기가 급속도로 후퇴하는 속에서 이루어졌고 급진정당들이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선거에서 나찌당의 의석수는 12석에서 107석으로, 공산당은 57석에서 77석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선거결과에 의해서 브뤼닝내각을 지지하는 적극적 다수세력은 라이히하원에서 형성될 수 없게 되었다. 반브뤼닝내각의 소극적 다수가 구성되지 않은 것은 사민당이 브뤼닝내각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이를 인내하는 정책을 선택한 덕택이었다. 브뤼닝내각의 재임기간 동안에 의회와 정당의 권력과 영향력은 빠른 속도로 감소했던 것에 반하여 국가권력의 중심은 이에 비례하여 행정부로, 특히 라이히대통령과 그의 보좌역들에게로 이전되었다. 브뤼닝내각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우파쪽으로의 세력확산을 시도하였지만 극우민족주의적인 반체제노선을 걷던 독일민족국민당, 철모회(Stahlhelm), 나찌 등으로부터는 여전히 타도대상이었다. 게다가 1931년 여름부터 경제위기가 가속되면서 브뤼닝내각은 민심으로부터도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1932년에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으로 재선되자 국방부 고위직에 있던 슐라이혀는 브뤼닝내각을 보다 더 우경화된 대통령정부로 교체하려고 시도하였다. 슐라이혀는 동시에 자신이 주도할 새로운 내각에 대한 나찌당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히틀러와 협상하였다. 여기서 슐라이혀는 나찌운동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새로이 건설할 권위주의체제에 포용할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후에 전개된 브뤼닝의 실각, 파펜(Papen)을 수상으로 하는 이른바 "민족통합"(nationale Konzentration)내각의 성립(이 내각에서 슐라이혀는 국방부장관에 취임하였다), 라이히하원의 해산, 나찌돌격대(SA)금지의 철회 등은 슐라이혀와 히틀러의 합의를 이행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펜과 슐라이혀가 주도하는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32년 7월 20일에 사민당이 주도하던 프로이센주정부에 대해서 이른바 "라이히집행"(Reichsexekution)을 행하였다. 1932년 4월의 선거 이후에 새로운 주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임시정부로 있던 프로이센주정부는 라이히군대의 점령에 의해서 강제로 퇴진되었다. 이로써 사민당은 최후의 권력거점을 상실하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는 상황에 봉착하였다.
2. 파펜내각과 나찌의 약진
1932년 7월 31일의 라이히하원선거에서 좌우의 급진정당들은 다시 한번 약진에 성공하였다. 나찌당은 230석을 획득하여 최대의 원내교섭단체로 되었다. 공산당은 이 선거에서 89석을 차지하였는데 양당의 의석을 합치면 라이히하원 전체의석인 608석의 과반수가 되었다. 하지만 양당이 협력을 할 가능성은 전무하였으므로 이는 소극적 과반수를 의미했다. 이 선거 후에 나찌당은 파펜내각을 인내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주도하에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톨릭중앙당의 선택이 주목되었는데, 이는 중앙당 출신인 브뤼닝의 실각으로 라이히대통령에게 실망한 상태에서 선거결과에 의해서 나찌당과 함께 원내다수를 형성할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중앙당은 파펜내각에 반대하는 나찌당의 노선에 접근하여 8월 30일에 괴링(Goring)이 라이히하원의장에 선출되는 것에 협조한다. 파펜내각이 새로이 구성된 라이히하원에서 극소수인 독일민족국민당과 독일국민당으로부터의 지원만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명백해지자 라이히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의회를 재차 해산해야 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이 의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파펜내각과 의회로부터 최소한 인내되던 브뤼닝내각의 차이점이다. 즉 바이마르헌법의 구조 속에서 대통령주도의 정부는 단지 의회가 이를 인용하는 한에서만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서 의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대통령내각은 존속할 가능성이 없었다. 의회가 해산된 후에 파펜은 선거를 무기한으로 연기하여 의회가 없는 상태에서 통치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 구상은 중앙당과 나찌당이 라이히대통령을 헌법위반으로 국사재판소(Staatsgerichtshof)에 탄핵할 위험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1932년 11월의 의회선거에서 나찌당은 라이히하원에서 최대의석을 지닌 교섭단체로 남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이백만표가량의 득표수가 감소되었다. 득표수의 감소는 곧이은 튀링겐의 지방선거에서도 계속되었다. 당시 나찌운동이 이미 그 정점을 지나 내리막을 걷고 있다는 징표는 그밖에도 발견된다. 히틀러의 입장은 자신이 수상이 되는 조건 하에서만 정부구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당내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입장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내"좌파"의 지도자였던 슈트라써(Strasser)는 히틀러의 수상취임과는 무관하게 정부구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나찌당과 나찌돌격대 내부의 갈등도 격화되었는데 이는 나찌운동의 추종자들이 매우 다양한 사회적 배경의 복합체였던 결과였다. 하지만 파펜의 입장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국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여전히 그에 대한 신임을 표명하였지만 라이히하원의 의석구성에서는 의회해산 이전과 비교할 때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파펜은 선거일을 공고하지 않고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의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방안을 다시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바이마르헌법 제25조 제2항이 의회해산 후의 선거는 60일이내에 이루어져야 함을 명시하고 있었으므로 이 시한 이후로 선거를 연기하는 것은 명백하게 헌법에 위반되는 일이었다. 수많은 헌법침훼로 통치하던 힌덴부르크에게도 이 경우는 너무도 명백한 헌법위반으로 보였다.
3. 히틀러의 집권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슐라이혀는 새로운 방책을 고안하였다. 이는 노동조합세력에서부터 나찌당의 슈트라써그룹까지를 관통하는 이른바 "횡단전선"(Querfront)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1932년 12월 30일에 슐라이혀가 파펜을 이어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이 방안이 실현되는 듯 했지만 곧이어 어려움에 부딪친다. 한편으로는 부수상으로 정부구성에 참여할 뜻을 보이던 슈트라써의 입장이 나찌당내에서 동의를 얻는 데에 실패하였다. 또한 공업과 농업의 이해관계에 기반하던 세력들은 노동수요창출을 위한 조치등 노동조합에 유화적인 정책을 포함하고 있던 신정부의 정책강령이 권위주의국가로의 지금까지의 진행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권위주의국가모델을 계속 추구하던 세력들은 이제 나찌운동이 지닌 대중적 기반의 도움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히틀러와의 담판을 통해서 슐라이혀의 노선에 대한 대안을 찾게 된다. 나찌에 대한 접촉을 주도한 것은 수상에서 물러난 파펜이었다. 1933년 1월 파펜은 나찌당의 연정참여의 조건에 대해서 히틀러와 협상하였다. 여기서 히틀러는 연정에서의 나찌당의 주도권행사요구를 점차 관철하여 갔다. 파펜은 동시에 히틀러, 독일민족국민당, 그리고 제국대통령 간의 중재에 적극 노력하였다. 이러한 파펜의 노력은 그가 1월 중순에 제국대통령으로부터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사전작업을 하라는 위임을 받아냄으로써 중요한 시점에 이른다. 이로써 힌덴부르크가 슐라이혀와 결별하는 것은 확실해졌지만 아직 새로운 정부가 어떻게 구성될 지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적인 전통에 충실한 야전사령관 출신의 힌덴부르크의 입장에서는 타협할 자세가 없이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사병 출신인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힌덴부르크는 오랫동안 망설이고 심사숙고하지만 라이히방위군이 군부쿠데타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마침내 1월 30일에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하였다. 히틀러내각에는 파펜이 부수상으로, 독일민족국민당의 지도자인 후겐베르크가 경제장관으로 참여했다. 히틀러내각은 의회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1930년이래의 내각들처럼 여전히 대통령내각이었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것은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이제 국가권력이 민주주의와 법치국가를 파괴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세력의 손에 장악되었다는 사실이었다.
V. 바이마르정당들의 나찌운동에 대한 취약점
바이마르민주주의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이 존속하던 최후의 순간까지의 과정은 여러가지 가능성 중의 선택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물론 1932년 여름에 급진정당들이 의회에서 소극적 다수을 형성해서 헌법의 기능이 마비된 이후부터는 운신의 폭이 결정적으로 협소해 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탈출구가 전혀없는 상황은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오히려 전체주의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적 의지였다. 이러한 점에서 특히 문제되는 자들은 1930년까지 의회민주주의를 권위주의적 모델로 대체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이후에 생긴 권력공간을 차지했던 세력들이었다. 바이마르민주주의 이전에 형성된 이들 구엘리트집단은 나찌의 전체주의적 독재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바이마르민주주의를 권위주의체제로 이전하는 데에 나찌운동의 대중기반이 유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온건한 정치세력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결속력있는 저항으로만 히틀러의 집권을 막을 수 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찌단과의 협력을 선택하였다.
바이마르민주주의의 실패는 기본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이마르민주주의를 방어하는 데에 실패했던 세력의 오류는 이를 파괴하는 데에 기여한 세력들의 책임과는 구별되어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유보 하에서 바이마르민주주의를 책임졌던 중도파와 좌파세력이 주어진 역사적 책무를 다하였던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바이마르체제를 지탱하던 정당들은 의회민주주의의 기능방식에 익숙하지 않았고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하였다. 1930년에 의회중심의 마지막 연정이 퇴진할 때까지 이들 정당의 역할인식은 입헌군주제하에서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다. 정당의 구조 역시 세기전환기까지 형성된 모습을 그 근본에 있어 그대로 유지하여 바이마르공화국하에서 진행되는 사회변동에 미치지 못하였다.
1. 기성정당의 소극성
특히 주목할 것은 정당들과 그들이 기반으로 삼았던 사회적 정신적 지지배경 사이의 전통적인 결속이 완화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노동자들이 사민당에 투표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바이마르공화국에 들어 약화되었다. 1928년의 선거결과를 보면 1925년 현재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가 노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유권자의 30%정도만이 사민당 또는 공산당에 투표하였다. 이에 반하여 사민당은 산업노동자 이외의 계층들로부터 보다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30년의 선거결과를 분석하면 산업노동자에 속하지 않는 사민당의 지지표가 사민당이 얻은 전체표의 40%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지유권자의 구조변화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은 당원구조로 볼 때에 여전히 노동자정당이었다. 1930년 현재 사민당원 중 노동자의 비율은 남편이 노동자인 주부를 포함하여 70%였다. 노동자 이외에는 사무직노동자(Angestellte)만이 10%의 비율로 통계상 의미있는 직능집단이었다. 중앙당과 카톨릭교도들간의 전통적인 유대관계는 이미 카이저제국에서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1870년대에는 카톨릭주민의 약80%가량이 중앙당에 투표했지만 1912년에는 이 수치가 60%를 못 미쳤다. 카톨릭교도에 대한 중앙당의 결집력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계속 약화되어 1932년 11월의 선거에서는 카톨릭유권자의 46.5%만이 중앙당과 바이에른국민당에 투표하였다. 전반적인 세속화추세 속에서 카톨릭주민 내부의 이해가 다변화되면서 카톨릭적인 기층문화가 통합력을 상실하는 것을 피할 수 없던 결과였다. 중앙당은 개신교도들에게도 지지기반을 확산하려 노력했지만 여의치 못하였다. 중앙당은 이처럼 결국 독자적인 구성원을 지닌 정당(Mitgliederpartei)이 되지 못하고 독일 카톨릭조직의 정치위원회의 역할을 하는 데 머물렀다. 중앙당이 카톨릭교회의 지원없이는 기능할 수 없었음은 1933년 중앙당의 붕괴과정이 잘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사민당과 중앙당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기 보다는 점차 느슨해 지는 전통적인 지지기반과의 유대를 유지하려는 데에 비중을 두었다. 따라서 이들 정당들은 1928년 이후에 특히 자유주의정당등 중도정당들에 투표하던 유권자들이 방향감각을 상실하면서 나타난 정당구조의 전반적인 재편과정 속에서 단지 소극적으로만 대응하였을 뿐 건설적인 해결책은 제시할 수 없었다.
비카톨릭의 중도정당들은 앞의 두 정당들과는 달리 이전의 지지기반을 전혀 유지할 수 없었다. 이들 정당의 붕괴는 바이마르민주주의의 실패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즉 비카톨릭중도정당들의 붕괴로 인해서 정치권력에 공백이 생김으로써 후에 히틀러의 집권에 협조하게 되는 구엘리트세력의 권력복귀가 용이해졌던 것이다. 또한 중도정당의 지지유권자들이 나찌당의 지지자로 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은 나찌당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의회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에 기여한 측면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부르조아중도세력의 붕괴는 이들 정당들의 분열로 시작되었다. 중소상공법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당(Wirtschaftspartei)과 국민권리와 화폐가치상승을 위한 라이히당(Reichspartei fur Volksrecht und Aufwertung)이 각각 1920년과 1926년에 창당된 바 있으며, 1928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계층을 기반으로 독일농민당과 기독교민족농민당이 창당되었다. 또한 독일민족국민당의 급진우경화로 이탈한 세력이 기독교사회국민봉사당과 보수국민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속되는 정당분열상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민주당이 1930년에 독일국가당(Deutsche Staatspartei)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온건부르조아세력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후에도 몇 번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특별한 성과는 없었으며 중도정당들이 붕괴되는 과정은 지속되었다. 중도정당들은 경제위기 속에서 점차 첨예해지는 중산층내부의 이해대립을 급진우파의 선동에 반해서 조정하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상공업세력의 지도부 역시 중도정당의 통합운동과 거리를 두어서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르조아세력의 통합운동의 중심이 점점 우익 쪽으로 이전하여 급기야는 극우세력의 연대체인 하르츠부르크전선(Harzburger Front)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또한 나찌당은 1932년의 선거에서 방향성을 상실한 중도정당지지표를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중도정당지지표는 1929/30년까지만 하여도 나찌의 선전선동이 노리던 목표가 아니었다.
2. 기성정당의 노령화
기성정당들은 융통성없이 고착되었던 것은 특정한 사회적 지지기반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기성정당들은 노선의 차이에 상관없이 지나치게 협애한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상상력도 열정도 없는 매력없고 지루한 존재였다. 전반적으로 비합리적인 시대사조에 열광하던 바이마르의 청년세대들은 189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세대와 190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세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1차대전 동안 어린 나이에 전방병사로 참전하여 예기치 못한 패전을 경험한 세대였고, 후자의 경우는 전후의 사회에서 잉여인간이라는 느낌을 받던 세대였다. 기성정당들이 새로운 시대정신과 고민하지 않는 한에는 정당의 고령화는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문제점과 관련해서는 바이마르체제를 담지하던 정당들 중에서 유일하게 독자적인 대중조직을 지니고 있던 사민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6년을 기준으로 사민당당원 중에서 30세이하인 자가 18%였고 40세이하인 자가 45%였던 데 반하여 공산당의 경우에는 1927년을 기준으로 이 수치가 각각 31.8%와 64.5%였다. 동시대의 관찰자였던 지그문트 노이만이 이러한 정체의 원인을 1890년대 이래로 사민당의 노선을 지배하던 일종의 속류화된 실증주의인 카우츠키주의에서 찾은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1930년의 선거에 즈음한 사민당의 정신적 지도자들의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이 거의 학자들이었던 데 반하여 이에 상응하는 공산당의 집회에서 서명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예술가들이었다는 사실"을 의미심장하게 본 것은 노이만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930년에 구성된 라이히하원에서 의원들의 연령구조를 보면 기성정당과 새로운 정당들간의 세대문제는 명료하게 드러난다. 40세이하 의원의 숫자는 사민당의 경우는 143명 중 20명, 중앙당은 68명 중 7명, 독일민족국민당은 41명 중 3명 그리고 독일국민당은 30명 중 2명이었던 데 반하여, 나찌당의 경우에는 105명 중 77명 그리고 공산당의 경우에는 77명 중 55명에 달하였다. 이 두 급진정당의 약진으로 말미암아 40세이하의 의원의 수가 1928년의 라이히하원에서 보다 두배이상 증가하였다. 비례선거제도에서 의원으로 당선되는 데에는 명부에서 안정권의 순위를 받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기성정당이 젊은 세대에 대해서 소홀했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존질서에 대한 젊은이들의 항의분위기가 기성정당에 의해서 소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는 반합리주의적인 시대사조를 극단으로 몰고가서 이용하려는 세력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나찌당의 극적인 도약은 물론 기존정당들의 문제점으로 인해서 반사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이른바 돌격대(Sturmabteilung: SA)의 폭력활동을 위시한 나찌당의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또한 간과될 수 없는 점은 나찌당이 기성정당들이 지녔던 구조적인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했었던 사실이다. 나찌주의자들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진부하게 된 사회집단들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극우민족주의적인 대중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다른 정당들에 비해서 국민정당으로서의 특성을 강하게 띄었다. 나찌당원들의 사회적 구성은 1930년을 기준으로 할 때에 다음과 같았다 (괄호 안의 수치는 각각 전체국민에 대한 비율임) : 노동자 28.1% (45.9%), 사무직종사자 25.6% (12.0%), 자영업자 20.7% (9.0%), 공무원 8.3% (5.1%), 농민 14.0% (10.6%), 기타 3.3% (17.4%). 이 통계수치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영업자, 사무직종사자, 공무원 등의 중산층이 나찌당에 평균이상으로 참여하였다는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는 나찌당이 그 이외의 직능집단, 특히 노동자들의 일부도 획득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당원들의 연령구조상으로 나찌당은 매우 젊은 정당이었다. 1930년을 기준으로 나찌당원 중 거의 70%가 40세 이하였고 37%정도가 30세이하였다. 나찌당은 사회계층의 차이를 넘어서 1890년생 이후의 세대에게 강한 흡인력을 지녔음이 명백하다.
전체적으로 보아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들은 기존의 지지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봉쇄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당체제의 위기증후군이 명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당들은 쇄신의 노력보다는 근시안적인 자기만족에 머물렀다. 어떠한 정당도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러한 상호봉쇄상황을 부수고 사회의 발전상태에 상응하는 새로운 입장을 세우는 용기를 지니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VI. 바이마르정당국가의 헌법학
1. 바이마르헌법학의 반다원주의
위에서 살핀 것처럼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구조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오랜동안의 관헌국가적 지배의 당연한 결과였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에는 어느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입헌군주제에서 의회민주주의에로의 전개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고 정치체제가 지체되었던 카이저제국후반기 이후에는 정당에의 인적 충원마저 공동화현상을 나타내는 등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들이 자신에게 다가온 새로운 과업에 대한 준비가 잘 되어있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의회민주주의에서의 정당의 역할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문화에서는 의회민주주의하에서의 정당국가화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점이 널리 퍼져있었다. 관헌국가적 지배질서하에서 형성된 국가와 정부는 모든 정파 위에 군림하며 특정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공공복리를 대변한다는 사고방식이 고착되었다. 입헌군주체제의 국법학자였던 블룬츌리(Bluntschli)는 정당은 자의로 가입 탈퇴할 수 있는 사회의 집단이므로 국가유기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국법학은 정당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이는 헌법과 국가질서는 정당의 차이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확고한 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당은 사회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을 대표하는 것이고 정당에 의해 구성된 정부 역시 사회의 부분이익만을 대변하여 결국 국가의 통일성을 해치고 분열을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헌국가적 반다원주의전통을 극복하려는 헌법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트마이어(Wittmayer)는 사회의 다양한 특수이익들을 공공복리의 실현에 대한 위협으로 보아 이를 근본적으로 배제하려는 민주주의론은 실제로 기능하는 민주주의의 현실과 부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이익대립이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사회현실 속에서 전래의 공공복리사상이 정치공동체의 결속을 위협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위험은 각각의 특수이익이 경쟁적으로 스스로를 공공복리와 동일시함으로써 절대화됨으로써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익정당이면서도 동시에 세계관정당이었던 바이마르정당들의 문제점과 관련해서도 적절한 지적이었다. 즉 민주주의에서의 공동체는 민주주의라는 국가형태를 형이상학적으로 도덕화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존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괄함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관점은 라트브루흐(Radbruch)에 의해서도 대표되었다. 라트부르크는 정당국가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이론이 아닌 민주주의의 사회학, 즉 정당국가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였다. 라트브루흐가 보기에 헌법학이 이러한 정당국가적 현실에 적응해야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국민과 국가간의 조직된 매개체가 없이는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바이마르헌법학의 주류가 정당국가에 대한 헌법적인 인정을 유보하는 것은 전래의 민주주의론 때문이 아니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관헌국가의 이데올로기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라트브루흐에게서는 당시의 정당국가론에서 흔히 보이는 전체로서의 국가와 부분으로서의 정당간의 긴장관계는 상당히 극복되었다. 민주주의에서 전체성은 그것이 의제적이든 또는 실체적이든간에 상호 경쟁하는 정치적 입장의 피안에서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당국가현상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던 라트브루흐는 당시의 정당체제의 문제점도 정확히 분석 비판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정당의 문제는 라트브루흐가 보기에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던 것처럼 정당들이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정당인 것이 아니라 고도의 확신정당 또는 신념정당인 점이라는 것이었다. 이익갈등은 타협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확신이나 신념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또한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다당제구조를 문제삼는 견해에 대해서는 정당의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정당간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양당제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구조를 의미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의 헌법학에서 이러한 다원주의적 입장은 극히 소수의 견해에 머물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현실을 받아들였던 헌법학자들도 관헌주의적 국가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였다. 바이마르공화국 중반기이후 헌법학의 주된 흐름을 대표하던 온건보수주의자 트리펠(Triepel)은 한편으로는 정당국가화 현상을 예리하게 분석하였지만 이를 헌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유보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다원주의적 정당국가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체계적인 비판을 가한 것은 칼 슈미트였다. 슈미트는 정치적 통일체의 본질은 긴급상황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주권적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국가를 다른 인적 결사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다원주의론은 결정적인 통일체로서의 국가의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슈미트는 출발점에서는 정치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을 구별하였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친구와 적의 구별로 극단화함으로써 국가가 사실상 유일한 정치적인 통일체로 되는 결과를 낳았다. 슈미트의 관점에서는 정당정치가 정치적으로 되는 것은, 모든 정당들의 대립을 상대화 시키는 포괄적인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가 힘을 잃고 국내적인 대립이 국가간의 대립보다 높은 강도를 얻을 때, 즉 내란에 준하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사실상 국가에 독점시키는 헌법이론을 구성함으로써 정당에 대한 헌법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결론을 도출했던 것이다. 이러한 슈미트의 반다원주의적 입장은 바이마르 헌정질서가 위기상황에 봉착하자 보다 적극적으로 되었다. 슈미트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위기를 조직된 사회세력인 정당들에 의해서 국가가 분할된 때문으로 보았다. 문제의 해결은 다원주의적 정당국가화의 경향에 대해서 국가의 내정상의 중립성을 확보하는 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헌법의 수호자인 제국대통령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슈미트의 반다원주의적인 정당국가비판론은 여러가지 다양한 권위주의적 헌법이론의 대표적인 예에 불과하였다. 우리는 슈미트 보다도 한층더 급진적인 반다원주의헌법이론을 헤어파르트(Herrfahrdt), 타타린-타른하이든(Tatarin-Tarnheyden), 코엘로이터(Koellreuter)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정당국가와 관련한 바이마르헌법학에서 논의의 중점은 의회민주주의를 전제로 정당체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지 않고 의회민주주의적 정당국가에 대한 찬반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헌법학의 논의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들이 지니고 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구체적인 기여를 할 수 없었다.
2. 다원주의적 정당국가의 기능조건으로서의 동질성문제
바이마르공화국에서는 좌우의 양대정당간에 권력이 교체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들 정당들이 정부에 참여하기 위해서 중도정당들과 연정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의회의 절대과반수의석을 지니지 못한 것만이 아니었다. 서로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좌우양대정당의 단독정부수립은 극도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되면서 연정을 구성하는 정당들의 능력마저 약해졌다. 이는 물론 전반적인 사회상황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경제사회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인 경영자단체와 노동조합간의 타협이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협력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사회의 조직된 세력들간의 갈등 뿐만 아니라 강력하게 조직된 이해관계와 조직화되지 못한 이해관계간의 갈등도 점차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현실상황 속에서 민주주의를 - 가치상대주의에서 출발하여 - 단지 다수결의 원칙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이마르공화국의 현실에서는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관이 통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법론적으로 유연하게 사고하던 국법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여 이를 동질성(Homogenitat)개념과 관련하여 논의하였다. 동질성개념이 논의의 주제가 된 배경은 당연히 새로이 형성되고 감지되는 사회의 이질성이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시민사회에서 대중사회로의 이전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였다.
슈미트는 동질성개념을 정치적이고 실체적으로 이해하여 이질화된 상태를 국민적 평등을 강화함으로써 극복하려 하였다. 헬러(Heller)는 이처럼 국민적 차원을 지향하는 슈미트의 동질성개념의 배경에 19세기에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기초였던 시민계급의 문화헤게모니를 복구시키려는 의도가 있음을 간파하였다. 슈미트에 반하여 헬러는 대중사회에서 장기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치문화의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이 새로운 정치문화는 시민계급이외의 세력, 특히 노동자들에게도 우리라는 의식(Wir-Bewußtsein)에의 동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을 창출하는 새로운 정치문화는 일정정도의 사회적 동질성이 형성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라이프홀츠가 헬러의 동질성개념에 접근하는 입장을 표명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시점에서의 라이프홀츠의 견해에 의하면: 의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 것은 그것이 다원주의적으로 분할된 사회세력의 무대로 되어 단순히 사회경제적 이익대표의 장으로 화한 때문이 아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내용을 상실하여 ... 의회민주주의의 기능조건인 정치적 사회적 동질성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동질의식은 원래 바이마르헌법이 탄생하던 때에는 서로의 이해를 조정할 자세가 되어 있던 노동자와 시민계급의 공동전선 속에 존재했었다." 라이프홀츠의 이러한 입장 표명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이른바 프로이센적인 정통보수주의의 흐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보수주의적 헌법학의 일각에서 다원주의적 정당국가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입장이 단초적으로나마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정치, 경제, 학문의 영역에서 상호 갈등하던 세력들이 접근하여 공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은 12년의 나찌집권이 끝난 후에야 계속될 수 있었다.
VII. 바이마르정당국가의 좌절이 주는 교훈
우리나라에서 민주헌정국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국민 속에 깊이 뿌리내려서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국민정당이 최소한 두개는 필요할 것이다. 최근에 서구에서 대두되는 정당국가비판론은 정당국가자체를 비판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정당국가의 문제점, 특히 정당이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것이 과장되어 받아들여질 필요는 없을 듯하다.
독일의 정당구조와 행태는 입헌군주제하에서 그 기초가 형성되었다. 입헌군주제하에서의 정당은 정치체제 내에 편입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정부구성에서 배제됨으로써 정치체제의 주변적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성된 정당의 특성들은 정당에게 중요한 역할이 부여되는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쉽게 극복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의 정당체계의 형성과정은 구체적으로는 독일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오랜 기간의 권위주의적 지배질서하에서 형성된 정당체계가 민주화된 헌정질서 속에서 바람직한 역할을 찾아가야 하는 점에서는 공통된 배경과 과제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이마르정당국가의 기능을 어렵게 했던 중요한 이유는 오랜 관헌국가적 지배질서 속에서 사회주의세력과 종교적 소수파였던 카톨릭세력이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이들 역시 명실상부한 정치체제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지만 여러가지 문제가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민주헌정국가의 선결과제 역시 배제되어 왔던 정치세력들을 통합해 내며 이들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분모를 확보해 내는 일일 것이다.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은 항상 사회를 탈정치화시키려 노력한다. 현대산업사회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지 못하는, 지역이라는 요소가 현재 우리나라 정당구조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은 현대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예민한 요소들이 정치화되는 통로가 막혔던 우리의 헌정사의 반사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지역정당구조를 사회적 지지배경에 고착되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체제와 동일선상에서 논의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경우가 모두 지지기반의 정당에 대한 지니친 충성심으로 인해서 바람직한 정당정치의 전제인 정치"엘리트간의 불확정적인 경쟁"을 저해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기본적인 해결방안은 그동안 억제되어 온 사회의 정치화경향에 물꼬를 터주고 이를 제도화하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현행 실정법상의 정당활동이나 정치활동에 대한 광범위한 법적 제한도 이러한 측면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구조를 통해서 우리는 고도로 산업화된 대중사회에서 다원주의적 정당국가가 민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넘어야 할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다원적 민주헌정국가에서는 사회의 부문이익들이 정치화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헌정국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들간의 타협이 제도적으로 체질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갈등이 이데올로기화하고 전부냐 전무냐의 문제로 확산된다. 바이마르헌정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현대다원주의사회에서 헌정국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이익갈등이 존재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해결할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는 정치문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헌법전 속의 자구들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전제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함을 바이마르헌정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2008/07/09 00:16
2008/07/09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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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 REPLY
아직 공부할 것은 이렇게도 많이 남아있는데...
2008/07/12 11:39
EDIT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
경제적 문제로 어려움 격고 있다기에 더 가슴아프네요. 어떻게든 해결이 되면 또다시 으싸으싸 해봐야죠.
2008/07/15 13:23
EDIT REPLY
그땐 정말 될줄 알았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실지......
나도 누구?때문에 이젠 완전 유빠 다 됬어요^^
2008/07/14 16:26
EDIT
유빠되었다고 그냥 아무것도 안하면 그건 직무유기.
촛불도 열심이 들고, 현실 참여도 열심히 그렇게 해야지.
일단 당신 하는일 열심히 하고 그거 다 끝내면 그렇게 해보자.
2008/07/15 13:25